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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100세 건강, 김형석 교수와 송해 선생의 장수비결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신년교례회가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어제도 두 곳이나 다녀왔다. 선거의 해인지라 참석자도 많고 열기도 뜨겁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건강하십시오’라는 덕담이 오가기 마련이다. 우리 모두가 건강 상식 때문인지 의료보험 덕인지 주변에 장수하는 사람이 많다. 주변 지인의 모친은 105세를 넘기고 있다. 1920년 생 김형석 교수는 올해 100세, 송해 선생은 93세이다. 단순히 연세만 많은 것이 아니라 아직도 두 분 다 열심히 뛰는 현역이다.김형석 교수님, 아직도 그는 신문 글을 쓸 뿐 아니라 전국을 누비며 특강을 하신다. 나도 매주 그의 100세 일기를 읽고 있다. 아직도 젊은이 못지 않은 의욕이 넘쳐나 부럽기까지 하다. 내가 김형석 선생을 처음 뵌 지는 50여 년이 훨씬 지났다.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우리는 학교 대강당에 모여 그의 특강을 들었다. 당시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 연세대 철학 교수 김형석 교수 강의를 직접 들은 것이다. 카랑 카랑한 목소리와 유머가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다. 나는 후일 그의 수필집 여러 권을 구해 밤새워 읽은 적이 있다. 며칠 전 그가 강원도 양구에서 지난해 마지막 특강을 했다는 기사도 보았다.송해 선생의 대중적 인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다. 일요일의 남자 송해의 ‘전국노래자랑’은 시청률이 매우 높은 프로이다. 지난해 대구의 송해 공원을 아내와 함께 찾은 적이 있다. 옥연지를 가로 지르는 다리 위 팔각정 아래 송해의 빛바랜 사진들을 보았다. 송해 공원 인근 마을이 그의 처가 곳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는 불행히도 사랑하는 아들과 아내를 먼저 저 세상으로 보냈다. 인간적인 불행을 딛고 그는 아직도 유쾌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그가 갑자기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가 쾌유하여 다시 전국을 누비기를 바란다.새해 아침 이 분들의 장수 비결을 생각해 본다. 무엇보다도 두 분 다 90넘어까지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즐겁게 한다는 점이다. 김형석 교수는 평생의 업인 강의를 통해, 송해 선생은 노래자랑을 통해 하시고 있다. 요즘은 건강에 관한 정보가 지나치게 넘쳐나고 있다. 한 가지 공통점은 스트레스가 건강의 적이라는 점이다. 두 분 다 자신의 일을 통해 스트레스를 날려 보내고 있다. 김형석 선생의 글에는 항상 위트와 유머가 넘쳐난다. 송해 선생의 말에는 아직도 유머가 곳곳에 배어 있다.두 분 다 고향을 떠난 실향민이다. 김형석은 평양 대동 출신이고 송해는 해주 출신이다. 실향민으로 이 땅에 정착키 위해 산전수전 다 겪은 분이다. 두 분 다 고난 속에서도 도전적인 삶을 살아오신 분이다. 그것 역시 장수의 또 다른 비결인지 모른다.내 친구 중에는 나이를 지나치게 의식하고 체면을 중시여기는 분이 많다. 어딜 가나 노인 행세를 하려고 한다. 내가 존경하는 K선생은 94세인데도 아직도 학술 강연에 열심히 참여한다. 지난해 주변 만류를 뿌리치고 연해주 항일 탐방까지 다녀왔다. 어느 분이 더 장수할 것인가. 독자 여러분의 건강을 기원드린다.

2020-01-05

어느 신부님의 성탄 메시지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또 한 해가 저물고 있다. 다사다난하지 않았던 해가 있었으랴만 올해는 유달리 복잡다단한 한 해였다. 남북 정상이 손을 맞잡았던 남북관계는 다시 얼어붙었다. 여야의 정치적 갈등은 극한적 대립으로 증폭되고 있다. 우리 경제는 성장을 멈춘듯하여 불안하기 그지없다. 보편적인 복지를 지향하는 나라에서 자살자는 증가하고, 얼마 전 우유를 훔치다 잡힌 한국형 장발장이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한다. 세상의 평화를 선도해야할 어느 목사는 광화문에서 정치적 갈등을 부추긴다. 크리스마스는 다시 찾아왔고 우리는 또다시 새해에 희망을 건다.크리스마스 전 어느 신부님의 강론은 듣는 이에게 경종을 울렸다. 고위 성직자도 아닌 우리 곁의 한 사제의 강론이 우리의 마음을 울렸다. 그의 강론 제목은 ‘성탄과 가난’이었다. 예수는 베들레헴의 마구간 구유 위에서 초라한 모습으로 탄생하셨다(루, 2.7). 성자이신 예수는 방 한 칸 구하지 못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신 것이다. 아기 예수 곁에는 가난한 요셉과 마리아만 있었고 목동들이 주위를 지키고 있었을 뿐이다. 세상은 아직도 크리스마스를 흥청거리는 날로 기억되고 있다. 우리 모두가 소외된 이웃과 함께하라는 신부님의 성탄 메시지는 새롭게 다가왔다.신부님은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루,16.23)를 통해 부자들의 삶의 각성을 촉구했다. 성서 상 라자로는 병들고 배고픈 비천한 인간이다. 그는 부자의 식탁 아래서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로 살아가고 있다. 식탁 밑의 개는 라자로의 종기를 핥아 먹는다. 훗날 지옥에 간 부자는 천국에 있는 라자로에게 물 한 줌 달라고 호소한다. 결국 강론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돌보지 않았던 부자의 비극적 최후를 설파하였다. 며칠 전 언론에는 우리나라에서 집을 100채 이상 가진 사람이 259명, 최고 집 부자는 594채를 가졌다고 보도하였다. 신부님의 강론은 오늘날 가진 자들의 위선을 비판하고 자선만이 구원의 길임을 되새겨 주었다.신부님은 마지막으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신앙은 결국 실천임을 강조하였다. 여행길에 강도당한 사람(루,10.30)을 사제와 레위인들도 모른척하고 떠나 버렸다. 유태인들이 그렇게 천시하는 사마리아인이 이 사람을 여관으로 데려가 보호해준다. 우리 주변에도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많지만 바쁜 세상 핑계로 모두가 외면해 버린다. 물질적 풍요가 더할수록 인정과 인심은 더욱 메마르다. 교회마저 세속이 들어와 가진 자와 높은 자들의 세상이 되어 버렸다. 신부님의 강론은 교회의 참된 책임을 일깨워 주었다.이 신부님은 젊은 시절 가톨릭정의구현사제단에서 활동하셨던 분이다. 세상이 온통 뒤범벅이고 정치가 탈선했을 시 정의 사회를 외쳤던 분이다. 오늘날 일부 개신 교회는 상속권 문제로 시끄럽고, 가톨릭에도 세속이 범람한다는 비판이 따른다. 마침 로마 교황은 바티칸의 성직자들이 역동적인 시대정신을 알아차리라고 강조했다. 오늘날 모든 크리스천들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에게 얼마나 관심을 가졌는지 자문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지극히 겸손한 보통 신부님의 비범성이 돋보이는 강론이었다.

2019-12-29

북한은 ‘새로운 길’을 갈 것인가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북한은 미국이 ‘새로운 셈법’을 제시하지 않으면 ‘새로운 길’을 간다고 선포한지 오래다. 하노이 회담 결렬 후 북한은 유엔의 대북 제재로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 스웨덴 스톡홀름의 북미 실무 회담마저 결렬된 후 북한은 더욱 상황이 어렵게 되었다. 북한은 연말까지 북미 협상이 타결되지 않으면 크리스마스 선물(?)을 한다는 엄포성 발언까지 하는 상황이다. 이에 미국은 북미 협상의 목표는 분명하지만 협상의 시한은 없다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비건은 서울에서 공개적으로 북미 협상을 제안했지만 북한은 아직 아무런 응답이 없다.북한은 연말까지 5차 당 전원회의나 신년사를 통해 그들의 ‘새로운 길’을 밝힐 것이다. 그 길은 과연 어떤 길일까. 북한 당국의 최근 동향을 통해 보면 하나는 북한당국이 미국의 대북 제재를 강력히 비판하면서 자신들의 요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곧 핵실험과 장거리탄도미사일(ICBM)을 발사하겠다고 선언하는 수준일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핵실험과 미사일 시험발사부터 강행한 후 미국에 핵 군축 협상을 요구하는 방안일 것이다. 북한은 이미 동창리 엔진 시험가동을 마쳤으며 그 연장선에서 탄도 미사일을 발사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 북미 마찰은 더욱 고도화되는 최악의 시나리오이다.북한이 이러한 노선을 선택하는 배경은 미국과의 협상에서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핵협상을 통해 제재해제도 체제의 안전 보장도 얻지 못했다. 북한은 이제 ‘연내 중대 결심’을 통한 ‘새로운 길’을 선포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다. 북한 김정은 정권은 대북 제재의 굴레에서 탈피하지 못하면 그들의 경제적 외교적 위기를 해결할 길이 없다. 북한의 유일한 외화벌이 수단인 해외 노동자들마저 완전 철수 시한을 코앞에 두고 있다. 북한은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핵무장 강화는 포기할 수 없는 전략이다.그러나 북한이 이러한 강경책을 선택할 때 그 후폭풍은 만만치 않다. 미국은 이미 북한에 대한 선제 타격이라는 군사적 옵션을 발표한바 있다. 미국은 이미 북한의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 정보 정찰기까지 시험한바 있고 최신형 B-1B의 NNL 침투 훈련도 마쳤다. 동해안에는 항모전단을 파견할 준비까지 마쳤다. 미국은 소위 코피 작전을 통해 동창리와 영변 등 핵시설부터 타격할 준비도 되어 있다. 북한 당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최고 지휘부에 대한 폭격 도상 훈련도 마친 상태이다. 유엔 안보리는 즉각 소집되어 북에 대한 압박수위를 높일 것이다.이러한 상황에서 북한 당국은 탄도 미사일이나 핵실험을 강행하기는 사실상 어렵다. 그러나 북한은 대내외적인 발언의 강도는 높일지라도 실제적인 행동은 유보할 가능성이 높다. 후견인 중국마저 북미간의 정치적 타결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당분간 핵능력을 과시하는 선전전을 통해 대미 압박을 계속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북한은 중국이나 러시아의 공조를 얻기 위해 6자 회담의 재개를 요구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북한의 ‘새로운 길’이 무엇인지 연말을 예의 주시하지 않을 수 없다.

2019-12-22

그 많은 남북 합의문 어디로 갔나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해방 후 남북한은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수많은 합의문과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박정희 정권은 유신 직전 1971년 7월 4일 이후락과 김영주 명의의 7·4 공동 선언을 발표하였다. 1992년에는 남의 정원식 총리와 북의 연형묵 총리간의 남북 합의서가 발표되었다. 남북 간 불가침과 교류와 협력의 의지를 담은 지금도 손색없는 문건이다. 2000년에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 위원장 간의 6·15 남북 공동 선언이 발표되고 뒤이어 2007년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간의 10·4 평화와 번영을 위한 공공 선언을 발표되었다.지난해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과 4·27 선언은 세계적인 뉴스거리가 되었다. 9월 문재인 대통령의 평양 시민들을 향한 7분간의 연설과 9·19 평양 선언은 남북관계의 획기적인 변화를 기대케 하였다. 그러나 금년 초부터 북한 당국은 남한 정부를 비난하고 남북관계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 버렸다. 북미간의 하노이 협상은 결렬되고 북한의 비핵화와 대북 제재문제는 조금도 해결되지 못한 결과이다. 남북관계는 다시 경색되고 결국 남북관계의 개선을 위한 그간의 합의와 조치들은 무용지물이 될 위기에 처해 있다.같은 분단국 운명으로 태어난 독일은 1972년의 양독이 체결한 기본 합의서를 충실히 이행하여 이미 1990년 통일의 꿈을 성취하였다. 1972년의 10개항의 양독 기본 협정문은 내용은 간단하지만 독일 통일의 초석이 되었다. 그후 서독 빌리 브란트의 동방 정책은 정권 교체에 상관없이 일관성 있게 꾸준히 추진되었다. 양독은 인적·물적 교류 뿐 아니라 방송까지 허용하면서 상호 신뢰를 구축시켰다. 통일 전 동독인들은 서독의 TV를 통해 분데스 리가 축구 경기를 같이 보았다. 양독 간 1972년 기본협약서 한 장이 결국 독일 통일로 이어진 것이다.우리는 남북 정상 간 지난해의 합의마저도 무용지물이 되고 있다.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근원적으로 남북은 아직도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고 적대적 공존 관계가 지속되는 한 그것을 지킬 의지가 사실상 없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6·25 전쟁과 같은 비극을 겪었고 그것이 이념갈등과 불신을 부추긴 결과이다. 친북과 반북, 용공과 반공이라는 프레임이 정치에 이용되어 득표로 연결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남북 정상 간의 합의마저 국회의 비준은 엄두도 못 낸다.결국 남북 합의마저 무력화 되는 비극이 반복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도 그간의 남북 합의서 상의 공통분모를 뽑아 통일 헌장으로 만들어 둘 필요가 있다. 북한은 세습정권의 특성상 최고 지도자의 서명 문건은 폐기치 않고 보존할 수밖에 없다. 우리도 그간의 공동선언이나 합의문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통일 헌장에 담아 국회의 인준을 받아 둘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국회 외교 통일위원회가 선도적 역할을 해야 할 것이며 여기에는 통일관련 시민 단체의 의견도 수렴해야 할 것이다. 이 통일 헌장은 가칭 우리의 ‘통일 국민 협약’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이것은 정권 교체에 관계없는 우리의 일관성 있는 대북 정책의 추진을 위해서라도 필요한 장치이다.

2019-12-15

백마 탄 김정은의 백두산 리더십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김정은은 소위 그들의 혁명 성지 백두산을 자주 찾는다. 눈 길 속에서 그는 리설주와 나란히 선두에 서고 최룡해와 박정천 등 군 수뇌부가 말을 타고 그 뒤를 따른다. 김정은은 중대 결심을 앞두고는 백두산을 찾는단다. 나름대로 조부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정신’을 되새겨 보겠다는 뜻이다.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북한은 미국에 ‘새로운 셈법’을 요구했으나 트럼프는 아직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트럼프는 김정은을 향해 ‘로켓맨’이라 비하하면서 필요시 군사력 사용까지 언급하고 있다. 다급해진 김정은이 백두산을 찾은 이유일지도 모른다.몇 해 전 나는 백두산 서파로 등정을 한 적이 있다. 한국 관광객들이 자주 이용하는 북파가 아닌 서파를 통해 백두산 천지에 손을 담갔다. 백두산 서파는 계단 1천442개를 거쳐 5호경계비에 이른다. 이 국경 경계비에는 앞뒷면에 조선과 중국이라는 국호가 새겨져 있다. 북한 땅을 30m까지 밟을 수 있는 곳이다. 사드 문제로 한중관계가 원활치 못하지만 중국 당국은 관광 수입을 위해 이곳 관광은 허용하고 있다. 서파를 오르면서도 길 왼쪽의 북한 백두산을 바라보면서 여러 상념이 들었다. 우리도 중국 땅을 밟지 않는 백두산 관광은 언제쯤 이루어질까.얼마 전 독일에서 만난 이사벨라는 동독 훔볼트대학 조선어과 출신이다. 그녀는 김일성대학에 유학하여 한국어에 능숙했다. 북한 유학 시절의 기억에 남는 것을 물었더니 백두산 혁명전적지 답사 행군이라고 대답했다. 무거운 배낭은 군 출신 학우들이 대신 메어주었단다. 이처럼 김정은이 백마를 타고 찾아간 백두산은 북한당국이 오래전부터 성역화시킨 지역이다. 북한 지폐 2천원에는 김정일이 태어났다는 백두산 밀영이 새겨져 있고, 그 뒷 봉우리가 정일봉이다. 김일성이 항일 투쟁의지를 새겼다는 3천여 그루의 ‘구호나무’(?)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 이처럼 백두산은 김일성의 백두혈통의 상징물이 되어 버렸다.김정은의 잦은 백두산 등정은 그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보강하기 위함이다. 김정은 세습정권은 대내적 안정을 위해 집권 초기부터 김일성의 상징을 조작하였다. 그는 조부 김일성의 헤어스타일, 복장, 중절모, 걸음걸이, 연설 행태까지 그대로 모방하였다. 그의 3대 세습에는 적대 세력을 과감히 제거하고 인민들의 충성심을 확보하기 위해 카리스마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는 ‘혁명 위업의 계승자’ 자격을 여전히 백두혈통에서 찾고 있다. 그는 조선노동당 7기 5차 전원회의를 앞두고 대내적 결속과 미국의 결단을 촉구하기 위해 백두산 등정길을 선택하였다.김정은은 2017년 말 당 중앙위 전원 회의에서 ‘핵, 경제 병진노선’을 포기를 선언하였다. 그는 2018년 4월 7기 3차 전원 회의에서 ‘경제 건설 총력 집중 노선’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북한의 자립 경제는 획기적인 개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김정은의 이러한 시대에 뒤진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경제 발전 노선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북한땅에서만 통용될 수 있는 그의 전통적 리더십은 오래 갈 수 없다. 김정은의 리더십이 합리적 리더십으로 바뀔 때 대남, 대미 수교도 경제 발전 정책도 빛을 발휘할 것이다.

2019-12-08

독일 통일을 벤치마킹하자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독일이 통일을 이룬지 내년이면 꼭 30년이다. 2차 대전 후 우리와 같은 분단국 독일이 1990년 통일되고 이제 EU의 중심국가로 우뚝 서 있다. 그들은 게르만의 자존심을 회복하고 지속적인 국가 발전과 번영을 누리고 있다. 물론 독일과 한반도의 분단 상황은 지정학적으로 다른 면이 있다. 독일은 우리처럼 동족간의 전쟁도 겪지 않았다. 그러나 2차 대전 후 전범국가의 청산과정에서 분단국가로 낙착된 점은 우리와 같다. 엄격히 말하면 독일처럼 일본 본토가 분단되어야 하는데 식민지였던 한반도가 분단된 점은 아무래도 역사의 아이러니이다.여하튼 우리는 독일 통일과정에서 통일의 교훈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서독의 일관성 있는 통일 정책을 벤치마킹해야 한다. 사민당 빌리 브란트가 시작한 동방정책은 정권이 여러 차례 바뀌어도 대동독 화해정책으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사민당의 브란트가 설계하여 1967년 시작한 동방정책은 1990년 기민당의 콜에 의해 독일 통일로 이어졌다. 통일된 지 30년이 된 독일 총리는 현재 동독 출신 앙겔라 메르켈이 맡고 있다. 우리는 정권이 바뀌면 대북 정책까지 180도 바뀌고 있다. 우리도 통일 정책만큼은 여야가 합의하여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독일은 1972년 양독 기본합의서를 채택하는 조약에 서명하였다. 10개조의 합의서 내용은 서독이 동독을 정부로 인정하고 유엔에 동시에 가입한다는 것이 기본 골자이다. 물론 양독간 외교 관계인 대표부를 설치한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양독은 이를 토대로 꾸준히 인적·물적 교류와 협력을 확대하여 1990년 역사적인 통일을 이룩하였다. 우리는 그동안 남북 공동선언, 남북기본합의서, 6·15 선언, 10·4 공동 선언, 지난해 9·19 공동 선언이 선포되었지만 발표와 동시에 사문화되어 버렸다. 우리는 남북 합의문의 실질적 이행장치부터 마련해야 할 것이다.양독 간에는 기본합의서와 여러 협정에 의해 상호 교류 협력이 증대되었다. 어느 통계를 보니 서독은 동독에 1년에 26억불을 지원하였다고 적혀 있다. 이는 우리의 10여 년의 대북지원액에 해당된다. 그러한데도 우리는 ‘퍼주기’ 논쟁을 일삼다 그마저 중단되었다. 독일의 슈미트 정부는 동독 도로 건설에 20억 마르크를 투자하였다. 심지어 콜 정부는 1983년 동독의 부채 10억 마르크의 차관보증까지 해 주었다. 그 대가로 양독 간에는 TV방송이 전면 개방되었다. 동서독의 언론인들은 교차 상주하면서 기사를 송출하였다.서독인들은 동독을 자유롭게 방문하였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에는 약 500만 명이나 방문하였다. 심지어 서독인들은 최고 50만대의 차량으로 동독을 방문하였고, 그때 벌써 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동독 전역에 파급되었다. 1987년 동독의 당서기 호네커도 서독을 방문하였다.우리가 김정은의 남한 방문에 기대를 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양독 간의 상호 교류가 독일 통일로 이어진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상호 여행이 엄격히 금지되고 있다. 남북의 숨구멍 역할을 하던 개성과 금강산마저 막혀버렸다.독일 통일은 인적·물적 교류 협력이 결국 통일로 이어진다는 역사의 교훈을 우리에게 남겼다.

2019-12-01

전쟁의 상흔(傷痕) 3곳을 찾아가다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6·25 전쟁은 민족적 비극이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남침한 북한 공산군은 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해 버렸다. 당시 우리 국군은 무엇을 했을까. 전쟁이 일어난 지 70년이란 세월이 흐르고 있다. 그러나 분단의 상흔은 아직도 남아 있다. 천만 이산가족 당사자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고 2세, 3세들은 가족 상봉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지난주 실향민과 탈북민이 함께하는 부산 거제 탐방여행에 동참하였다. 부산의 임시 정부청사, 유엔군 묘지,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둘러보는 이틀 일정이었다.부산 임시 정부청사부터 찾았다. 이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부산 부민동 2만8710㎡의 임시 정부청사, 붉은 벽돌식 2층 건물은 아직 잘 보존되어 있었다. 1923년 설립되어 일제 시부터 경남도청으로 사용했던 이 건물은 6·25 전쟁 시 임시 정부청사로 이용되었다. 이 건물에서 비상 국무회의가 개최되고, 대통령의 긴급 전시의 행정이 집행되었다. 당시의 도지사 관사는 오늘날 임시수도 기념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부산 임시 정부도 전황이 나쁘면 제주도로 옮길 계획을 세웠다니 아찔한 생각이 든다. 아픈 역사의 상처를 잊어버린 듯 이곳을 찾는 사람은 적었다.오후에는 새롭게 단장하여 6·25 참전 전사자 2천300기를 모시는 대연동의 유엔 기념공원을 찾았다. 공원 내에는 전쟁 시 희생된 4만869명의 희생자들의 이름이 빼곡히 새겨진 위령벽도 있었다. 공원 내에는 16개 참전국과 의료 지원국 5개국 등 22개국 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1955년 유엔 총회는 이곳을 세계 유일의 유엔군 공원으로 확정하였다. 우리 일행은 이역만리에서 파병되었다가 전쟁에서 산화한 이들에게 정중한 묵념을 올렸다.우리는 마지막 일정으로 거제 포로수용소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북한 인민군 포로 15만, 중국군 포로 2만 명, 최대 17만3천여 명의 포로가 수용되었던 역사의 현장이다. 여기에 여성 포로 300여 명도 포함되어 있음에 놀랐다. 현장에 재현된 형편없는 수용소 막사는 당시의 상황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이곳에서는 반공포로와 친공포로간의 유혈 살상도 있었다. 1952년 5월 7일에는 수용소 관리관 돗드 준장이 포로들에게 납치되는 사건도 있었다. 반공 포로가 석방되고 휴전 협정이 체결되어 이 수용소는 폐지되었다.이번 탐방은 우리 모두 전쟁 아픈 상처를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이번 방문객들은 대부분 6·25의 비극을 체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들이다. 최근 북한을 탈출하여 새롭게 출발한 이들은 신기한 눈으로 비극의 현장을 바라보았다. 북에서 그들이 배운 6.25를 미화한 ‘민족해방’ 전쟁의 부당성만은 충분히 목도했을 것이다. 전쟁 시 남한으로 피난해온 실향민들은 전쟁의 참화를 체험하고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 전쟁의 상흔을 바라보는 그들 간 시각에는 다소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의 비극이 이 땅에서 재현될 수 없다는 교훈은 모두가 깨닫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2019-11-24

1948년 평양 4김 회담과 김구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1945년 8·15 해방 정국은 어수선했다. 얄타 협정에 의해 38선을 경계로 미군과 소련군이 한반도 남북을 갈라 진주하였다. 해방 후 당시 국내 정국은 신탁과 반탁, 단정과 통일 정부 수립으로 양분됐다. 중경 임정의 주석 김구 선생은 임정 대표 자격을 상실한 채 그해 11월 겨우 미군 비행기로 귀국했다. 귀국 후 김구 선생은 좌우합작운동을 벌이면서 중도파를 규합한 김규식과 뜻을 같이 했다. 해방 정국 초기 김구는 이승만과 호형호제하면서 우호적이었으나 결국 정부 수립 문제로 상호 불신과 갈등을 겪게 된다.이승만의 단정을 반대하던 김구는 북측에 남북 지도자 회담을 제의한다. 1948년 3월 25일 북에서 응답이 왔다. 김일성과 김두봉이 “통일적 자주독립을 위한 전조선 대표자 연석회의를 갖자”는 것이다. 1948년 4월 19일 김구는 통합 정부 수립이라는 일념에서 반대를 무릅쓰고 북행을 강행한다. 출발 당일까지 경교장 담 밖의 수많은 청년들의 반대 시위가 있었다. 그는 김규식과 비서 선우진, 아들 김신만 데리고 평양에 도착한다. 백범일지는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고 기록하고 있다.4월 21일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김일성이 ‘북조선 정세보고’를, 백남운과 박헌영이 ‘남조선 정세보고’를 했다. 4월22일 남한 41개 단체, 북한 15개 단체의 695명이 연석회의장을 가득 채웠다. 박헌영, 백남운, 김구, 김규식, 조소앙, 김일성, 김두봉 등 좌우익 명망가들이 한 자리에 앉았다. 23일 남북 대표자들은 남과 북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투쟁을 벌일 것을 약속했고, 미국과 소련의 양국군이 동시에 한반도에서 철군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연석회의는 정부 수립에 관한 완전한 합의는 이루지 못했다. 분위기는 벌써 ‘김일성 만세’ 소리에 술을 따라주고 주악이 울려 퍼지는 이상한 분위기가 연출됐다고 한다.4월 30일 4김 회담은 김두봉 집에서 김구, 김규식, 김일성이 참석해 성사됐다. 이 회의에서 남한에 대한 전기송출 문제와 연백댐의 개방에는 합의했다. 김구는 그 회담에서 조만식 선생을 남쪽으로 대동하겠다고 요구했으나 김일성은 여러 핑계를 대며 묵살했다. 김일성은 회담이 결렬되자마자 전기와 농업용수를 끊어버렸다. 김구는 5월 30일 힘없이 서울로 돌아왔고 평양 연석 회담에 실망한 그는 김일성의 2차 회담 제의마저 거부했다.1948년 남한에서 5·10 선거가 치러지고, 북은 6월 29일 ‘인민공화국’ 수립을 결정한다. 이듬해 1949년 6월 29일 김구 선생은 73세로 암살이라는 비운을 맞는다. 김구 선생은 민족 통일이라는 원대한 꿈을 펼치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한 것이다. 그는 생전 남북한 단정 수립은 결국 군사적 대결과 민족의 영구 분단으로 이어진다고 개탄했다. 1950년 6·25 전쟁을 정확히 예측한 것이다. 그는 조국과 민족을 위한 헌신성은 탁월하지만 정치적 현실 감각이 부족하다는 비판도 받는다. 그러나 그의 항일 우국충정은 어느 누구도 추종하기 어렵다.

2019-11-17

연극 ‘산불’을 통해본 분단의 비극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오랜만에 연극 ‘산불’을 보았다. 차범석 선생의 이 작품은 널리 알려진 작품이지만 연극을 통해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극단 예전의 중견 배우들이 열연한 이 작품은 6·25 분단의 비극적 상황을 리얼하게 볼 수 있게 해준다. 지방의 척박한 문화 예술 환경하에서도 지역 연극인들의 중후한 연기는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 연극의 출연진들이 모두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하여 작품의 토속 성을 높였고 무대와 관객의 거리를 훨씬 좁혀주었다.이 연극은 6·25 전쟁기간 중의 산골 주민들의 애환을 잘 보여주었다. 조용하던 시골 마을도 인민군 점령으로 좌우 이념의 갈등이 시작된다. 마을을 점령한 인민군이 ‘위대한 수령’ 만세를 외치고, 인민군 퇴출 후 국군이 진주하여 부역자를 색출한다. 동네의 청년 전직 교사 규복은 북한의 빨치산에 가담하여 활동한다. 그는 어디로도 갈 수 없어 대밭에 숨어 사는 신세가 되어 버린다. 극한 상황에서도 피어나는 과부와 규복의 3각 애정 관계는 관중을 무대로 끌어들인다. 무대 중간 중간 배고픈 김 노인의 밥을 달라는 ‘밥- 도-’라는 외침은 관객들의 실소를 자아낸다. 토벌대에 의해 사살되어 돌아온 규복의 비극적 죽음이 이 연극의 피날레이다.몇 해 전 프랑스에서 피카소의 ‘조선의 비극’을 본적이 있다. 프랑스 공산 당원이었던 피카소는 미국의 침략전쟁을 상징적으로 작품을 그렸다. 미국에서 활동한 소설가 김은국은 ‘순교자’(martyr)를 통해 전쟁의 비극을 잘 묘사하였다. 북한 땅에서 ‘하느님이 있느냐’는 공산당의 질문에 돈독한 신앙심을 보였던 목사가 오히려 신을 부정하는 장면이 연출된다. 이 소설이 영화화되었을 때 기독교인들이 철저히 반대한 이유이다. 어릴 때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밤새워 읽은 적이 있다. 6·25전쟁 시기의 빨치산과 보수 우익 등 여러 군상을 만날 수 있다.이 연극을 보고 돌아오면서 나는 내 고향에서 겪은 나의 6·25를 회상해 본다. 내 나이 여섯 살 때 격은 전쟁의 비극이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기 때문이다. 우리 동네는 인민군 치하에서 여러 달을 보냈다. 나는 인민군 아저씨의 총을 만져 보기도 하고, 뒷산 굴속에 숨어 있는 고모의 심부름도 자주 하였다. 인절미를 해 달라는 인민군에게 그것을 할 줄 모른다고 손을 내젓던 아주머니, 인민군 퇴각 후에 사랑방에 남아 있던 그들의 물통, 탄피 통, 허리띠는 우리들의 생활용품이 되었다. 서울대 졸업식에 간 후 행방불명된 집안 아저씨도 당시의 주역들도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어언 해방 75년, 분단의 세월 70년도 함께 흐르고 있다. 주변에는 아직도 가족의 생사를 모르는 사람도 많다. 내 주변에는 전쟁 통에 행방불명된 부친을 그리다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도 있다. 남북의 통일이 어렵다면 헤어진 가족이라도 만나게 하는 것이 인간적 도리이다. 여하튼 연극 ‘산불’은 전쟁과 이념 갈등, 인간의 욕망, 좌절을 유감없이 보여준 훌륭한 작품이다. 이러한 분단 문학이 이념의 갈등과 분단의 상처를 조금이라도 치유하는 도구가 되길 바란다.

2019-11-10

탈북 주민의 가족 결연식을 보면서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대구 지역에도 탈북민 670여 명이 살고 있다. 또 대구에는 6·25 전후로 넘어온 이북 5도민도 36만 명에 이르고 있다. 이들은 모두 망향의 설움을 안고 사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이북 5도민들도 대부분 초기에는 온갖 어려움을 감내하면서 이곳에 정착한 사람들이다. 이들 중 기업인으로서 성공한 사람도 있고, 그 자손들이 각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도 많다. 그러나 탈북민 중에는 아직도 정착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많다. 어제 이북5도민회가 탈북자들을 돕겠다는 취지로 마련한 가족 결연식에 참여하고 왔다.탈북민들의 정착 과정과 양상은 매우 다르다. 어느 탈북민은 국내 굴지의 증권회사 수위로 취직한 후 증권 전문가가 되어 수십억대의 자산가가 되었다. 내가 잘 아는 여성 A씨는 북에서 교수를 하다 내려와 그의 북한 ‘준박사’ 자격증이 인정되어 박사 과정에 특례 입학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국책 연구기관 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B여인은 중국을 거쳐 신병치료를 위해 탈북해 왔지만 다시 평양으로 가겠다고 절규하고 있다. 북한의 명문 김책공대를 졸업한 엘리트 C씨는 아직 취업도 못하고 공사판을 전전하고 있다. A씨를 제외하면 3분이 아직 기초 생활비 수급자로 살아가고 있다.통일 전 동독민들의 서독 정착은 비교적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동독의 트럭 운전기사는 이틀 만에 서독 운전기사로 취업되었고, 미용사는 바로 동네 미용실에 취업되었다. 통일 전 양독 간 인적·물적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진 결과이다. 그러나 남북관계는 독일과는 완전히 다르다. 독일과 달리 우리는 6·25 라는 전쟁을 겪었고, 교류가 완전히 단절된 상태로 살아왔다. 체제가 너무 이질화될수록 탈북민들의 정착은 사실상 어렵다.탈북주민 중에는 남한 사회가 의외로 배타적이고 차별이 심하다고 불평한다. 탈북민 상당수가 자신의 신분 노출을 꺼리는 이유이다. 그들 중에는 이곳에서 간첩으로 오해받기도 하고, 사기를 당하기도 했단다. 어떤 탈북자는 지하철 타기부터 경쟁하는 남한 사회가 살기 어렵다고 실토한 바도 있다. 북한 수령체제의 경력과 의식 구조는 이곳에서는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 중에는 경제 문제가 해결되니 북쪽 가족이 그리워 매일 잠을 설치는 사람도 있단다. 지난번 탈북 모녀의 비극적인 자살은 탈북자의 고달픈 삶을 여실히 증명해 준다.이들을 위한 종합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 탈북자 3만3천 명도 포용치 못하는 우리 사회가 어떻게 통일 문제를 논할 수 있을까. 선교 목적의 종교 단체의 탈북자 돕기 사업은 한계가 있다. 시민 단체의 탈북민 포용정책은 더욱 확대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의 진보적인 통일운동 단체의 탈북자에 대한 냉대나 무관심한 태도는 지양되어야 한다. 정부의 일시 정착금 지원과 임대 아파트 제공만으로 탈북자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이들의 정착을 돕는 정부와 시민 사회의 획기적인 방안이 마련되어야 할 시점이다.

2019-11-03

김정은의 금강산 남측 시설 철거령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백두산에서 백말을 타고 달리던 김정은이 이번에는 금강산을 찾았다. 그는 금강산의 국제 관광지구 재건을 위해 ‘너절한 남쪽 시설물’을 제거하라고 지시하였다. 남북관계가 좋았던 시절 필자는 여러 차례 금강산을 다녀온바 있다. 대형 유람선을 개조한 장전항의 해금강호텔에서 개최된 전국 국립대교수협의회를 주관하기도 하였다. 금강산 호텔에서는 남북 학자들 50여 명이 참가한 ‘남북(북남)관계의 발전과 학자들의 역할’을 주제로 한 학술토론회에도 참여한바 있다. 그곳의 이산가족 면회소, 평양 서커스 공연장, 간이식당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현대아산이 7천800억 원을 들여 지은 시설물인데 김정은은 이 시설을 싹 들어내라고 지시했다.북미 회담을 앞둔 시점에서 김정은의 이러한 돌출선언의 배경은 무엇일까. 김정은은 일찍부터 금강산 관광 특구개발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그는 원산의 갈마반도에 5성급 호텔을 여러 채 짓고, 마식령 스키장과 연계하여 금강산 관광 특구 사업을 야심차게 추진하였다. 그러나 유엔의 대북 제재는 대북 관광 자체를 봉쇄했다. 북한은 이에 동조하는 남한의 소극적인 자세에 불만이 많았다. 이것이 김정은이 남한의 건축물 철거를 위한 협상 통지문을 보내온 배경이다. 개성과 금강산에 막대한 재산을 투자한 남한 기업인들의 타들어 가는 심정은 어떠할까 짐작하고도 남는다.김정은의 금강산 시설물 철거 관련 발언은 그의 개혁 개방의 의지를 드러낸 측면도 있다. 그의 이번 금강산 현지 지도에 국무위 설계국장 마원춘과 외무 담당 최선희 등이 수행하였다. 그는 4개월간 보이지 않던 리설주까지 대동하였다. 이는 김정은 시대의 관광 개발 특구 정책을 가속화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그는 “금강산의 자연경관에 어울리는 현대적인 시설들을 북한식으로 새로 건설해야 한다”고도 하였다. 북한당국이 금강산 등 관광 특구를 본격화하기 위해서는 외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유엔의 대북 제재는 이를 기본적으로 봉쇄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이번 철거 협상 제의는 외교적 협상이라는 ‘협박성 애걸’이 포함되어 있다.김정은의 이번 발언에는 선대(先代)의 관광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한 점이 포함되어 있다.그는 “‘선임자들의 대남 의존 정책’이 매우 잘못되었다”고 지적했다. ‘국력이 여릴 적에 남에게 의존하려 했던 선임자들의 정책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가 지목한 선임자가 김정일을 말하는지 담당 책임자를 말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북한 세습 체제의 특성상 그들이 절대시하는 수령보다는 관광 책임자를 일컫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실은 김정일도 과거 중국 상해를 방문하여 그의 부친을 원망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애매모호한 발언이지만 후계자가 선대를 비판하는 듯한 발언은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3대 세습체제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김정은의 이러한 발언은 북한 체제 변화를 위한 하나의 몸짓이라고도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금강산 관광시설의 철거를 위한 남북의 협상 과정을 지켜볼 수 밖에 없다.

2019-10-27

평양 남북 ‘깜깜이 축구’의 내막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월드컵 지역예선 평양 남북 축구 경기에 대한 기대는 매우 컸다. 그러나 그 기대는 무(無)중계 무관중 경기로 우리를 실망시켰다. 평양 김일성 경기장의 남북 축구는 ‘깜깜이 축구’로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우리 축구팀은 남북 직항로를 포기하고 베이징을 경유하여 이틀 만에 겨우 평양에 도착하였다. 남북의 축구 대표 팀은 텅 빈 김일성 경기장에서 육박전에 가까운 거친 경기를 치른 것이다.우리는 오랜만에 열리는 남북 축구가 남북관계 개선의 계기가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북한 당국은 모든 협상을 배제한 채 관중과 중계가 없는 경기만을 허용하였다. 아시아축구연맹(AFC)도 경기 인원과 응원단의 차별 없는 비자 발급을 의무화하였는데 북한은 이를 무시한 것이다. 지난해 9·19 선언 시 문재인 대통령을 그렇게 환호하던 평양시민들은 도대체 어디로 갔는가. 북한 당국은 북미 회담이 기대되는 시점임에도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북한 당국의 이러한 태도는 많은 것을 잃게 하였다. 경기장의 무관중은 그들이 아직도 엄격히 ‘통제되는 전체주의 사회’임을 여실히 보여주었다.북한 당국이 금지시킨 중계방송도 스포츠의 보편적 보도 상식을 넘는 행위이다. 국제 축구연맹(FIFA) 규약은 스포츠의 ‘정치적 중립’을 의무화하고 있다. 북한의 처사는 북한이 언론의 자유가 없는 통제된 사회라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한 셈이다. 북한 당국은 과거 정치적 필요에 따라 선수단과 응원단을 남한에 파견하여 정치적 선전의 도구로 활용하였다. 부산 유니버시아드, 인천 아시아경기대회, 지난해 평창올림픽에서도 그들은 대규모 미녀 응원단을 파견하여 선전효과를 노렸던 것이다. 이번의 북한의 무중계 방침은 아무래도 이해되지 않는다.우리는 북한 당국이 이러한 ‘깜깜이 축구’를 결정한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노이 노딜 회담 이후 남한 정부의 중재자 역할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북한이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는 격이다. 북한 당국은 남한의 역할에 대해 최근에도 냉소적인 태도를 보였다. 특히 북한은 지난번의 한미 군사 합동 훈련과 최첨단 전투기 F35A등 도입에 대한 반응이다. 이들은 10여 차례의 잠수함탄도미사일(SLBM)의 시험 발사도 모자라 평양 축구 경기까지 압박용 카드로 선택한 것이다. 일부에서는 북한의 축구 실력이 남한에 현저히 뒤졌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모두가 북한의 유치한 발상이다.어떤 이유건 북한의 이번 처사는 북한 스스로 ‘비정상 국가’임을 스스로 보여주었다. 북한은 중요한 외교적 담판이 있을시 소위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하였다. 그러나 북한의 이러한 전술은 이를 간파한 미국이나 한국이 이제는 수용하지는 않는다. 결국 북한은 이번 ‘깜깜이 축구’에서 얻은 것은 없고 오히려 잃은 것이 많을 것이다. 북한의 처사를 비난하는 국제적 여론만 악화시켰을 뿐이다. 그러나 북한 노동신문은 김정은과 여동생 김여정은 백두산에서 백말 타는 모습만 보이며 체제의 안정을 과시하고 있다. 정부도 북한의 ‘깜깜이 축구’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보여야 할 것이다.

2019-10-20

북한의 우상화와 시장화의 역설(逆說)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북한 당국은 최고 지도자를 항상 우상화하고 있다. 북한은 김일성과 김정일의 ‘혁명 역사’와 ‘혁명 활동’까지 초중등의 핵심교과로 삼고 있다. 김일성 부자의 신출귀몰한 ‘혁명적 행위’는 우상화를 넘어 신격화 수준에 이르고 있다. 김일성의 전기인 ‘세기와 더불어’도 그의 항일 투쟁과 빨치산 활동을 과장 선전하고 있다. 북한은 우상화를 통해 수령의 왕국 건설을 위해 일사불란한 체제의 안정을 도모하고 있다.이러한 수령 우상화 현상은 김정은 시대에도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 2011년 김정일 사후 1984년 생 28세 김정은은 세습왕조의 통치를 위임받았다. 북한 당국은 그의 일천한 경륜 보강을 위해 상징조작을 시작하였다. 그의 헤어스타일과 제스처, 검은 뿔테 안경, 흡연 장면, 복장까지 할아버지 김일성을 모방하고 있다. 김정일이 회피하던 대중연설도 그는 할아버지처럼 수시로 연출한다. 30대의 통치자 김정은을 노령의 간부들이 호위하고, 그의 현장지시는 모두 빠짐없이 받아 적는다.‘적자생존’의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고모부 장성택처럼 조금이라도 불경한 태도를 보이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처벌받는다. 모두가 우상화 강화 현상이다.김정은 시대의 이러한 우상화에도 불구하고 북한 땅에서는 시장은 날로 확산되고 있다. 농촌의 소규모 장마당에서 출발한 종합 시장은 벌써 500여 개가 넘었다. 시장화에 따라 북한의 ‘돈 주’는 자본가 행세를 하고 빈부의 격차는 심화되고 있다. 북한의 시장화는 정보화가 촉진되어 휴대폰 소유자가 600만 명을 넘었다. 시장화의 급속한 진전은 기아자의 감소 등 긍정적인 측면도 나타난다. 그렇다보니 북한 당국은 이제 시장화의 물결을 막을 수 없다. 북한 시장에서 돈을 벌려는 사람은 증가하고 똑똑한 사람일수록 신흥 부자가 되려는 것이다.이러한 북한사회의 시장화 진전은 우상화의 역행 현상을 초래한다. 그러나 북한의 시장 정책은 가다 서다를 반복하지만 이제 시장화의 큰 물꼬를 막을 수는 없다. 벌써‘우리를 배고프게 하는 수령은 우리의 수령이 아니다’는 말까지 번지고 있다. 김정은이 작년부터 선군(先軍)보다는 선경(先經)을 앞세우는 이유이기도 하다. 시장은 중단된 북한의 공업을 다소나마 회생시키고 물류와 운수업이 동반 성장하게 된다. 동시에 시장을 통한 정보화의 진전은 주민들의 의식까지 변화시키고 있다. 이처럼 시장화가 촉진될수록 북한의 우상화 정책은 지장을 받는다. 북한 인민들은 ‘위대한 수령’보다는 ‘눈앞의 빵’을 더욱 선호하기 때문이다.시장경제는 결국 주민들이 이념보다는 실용적 가치를 선호케 한다. 그러다 보니 북한 땅의 시장화는 우상화정책에 역행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북한 당국은 시장화의 부작용을 줄이려고 무던히 애를 쓰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시장화에 따른 다양한 사회적 욕구마저 당이나 국가가 통제할 수는 없다. 시장화가 촉진될수록 독점 권력은 분산되고 다원화된다. 앞으로 북한 인민들의 정치적 욕구도 다원화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시장 경제의 초보 단계인 북한에서 주민들이 반정부 반체제 의식은 조직화되지 못하고 있다. 오렌지 혁명을 기대하기 어려운 이유이다.

2019-10-13

북한 헌법 개정, 체제 변화의 신호일까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지난 7월11일 북한 최고인민회의는 개정 헌법을 ‘내 나라 홈피’를 통해 공개했다. 이 헌법 개정은 1948년 인민민주주의헌법 제정 이후 18차, 1972년 사회주의 헌법제정 이후 8차, 김정은 등장 이후 4차 개헌이다. 북한의 헌법 개정은 김정은 체제 하의 북한의 미묘한 변화를 감지하고 예측할 수 있다. 북한은 헌법 개정을 통해 선군시대의 당-군-정 체제를 당-국가 체제로 전환함으로서‘사회주의 정상국가’의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북한의 헌법 개정은 과연 북한체제 변화의 신호일까.먼저 이번 개정 헌법에서 북한은 통치이념을 주체사상과 선군사상에서 김일성·김정일 주의로 명시화하였다. 이는 북한이 위기 시의 선군정치와 결별하고, 김일성·김정일을 다시 받들어 김정은 권력의 정당성을 부각하려는 의도이다. 북한 당국은 군대와 무력을 앞세운 김정일 ‘선군 시대’ 흔적을 지우기 위해 ‘선군혁명노선’을 과감히 삭제한 것이다. 또한 종래의‘우리 민족제일주의’를 배제하고 ‘우리 국가 제일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개정 헌법 서문에서도‘사회주의 조국’을‘사회주의 국가’로 변경하여 ‘세계 유일무이한 국가실체’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핵 보유국가’라는 표현은 그대로 남겨 핵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다.이번 헌법은 김정은의 위상을 ‘국가를 대표하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최고 영도자’로 표현하여 그를 명실상부한 국가수반으로 명시하였다. 이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국가수반으로 명문화하여 향후 남북 및 대미, 대 유엔 외교에서 그의 역할을 확장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또한 헌법은 국가 무장력의 사명을 ‘혁명수뇌부 보위’에서 김정은을 수반으로 하는 ‘당중앙위원회의 결사 옹위’로 변경하였다. (59조) 이는 김일성·김정일 시대를 넘어 김정은 시대의 도래를 헌법에 명시한 결과이다.이번 헌법 개정에는 과거 핵·경제 병진노선 대신 경제 총집중 노선에 따른 경제 발전노선을 명문화하고 있다. 그들은 대표적인 경제 관리지침인 ‘청산리 정신과 방법’과 ‘대안의 사업 체계’를 과감히 삭제하고 대신 ‘혁명적 사업 방식’과 ‘사회주의 기업 책임 관리제’를 대체했다. 북한이 경제 발전을 위해 내각의 역할(33조)과 실리 보장(32조)을 강조하여 김정은 집권 이후 취해온 경제 조치들을 보장한 결과이다. 또한 이번 헌법은 정보화(26조), 과학기술력(27조), 전민 과학기술 인재화(40조), 대외 신용과 대외 무역(36조) 등 경제 분야의 변화 양상을 적극 반영하였다.이처럼 북한의 헌법은 외형상 북한체제의 변화를 지향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북한의 적극적인 개혁·개방의 신호로 보기는 어렵다. 북한의 당-국가 체제는 북한 정치 개혁의 변화신호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 헌법은 경제 발전의 동력을 확보 하려는 경제적 조치를 헌법 여러 곳에 명시하고 있다. 북한이 비핵 협상을 통해 체제의 안정을 보장받고, 실질적 경제 제재가 해제된다면 북한 개혁·개방의 동력은 가시화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북한의 헌법 개정은 체제 변화를 위한 신호라기보다는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경제 응급조치일 뿐이다.

2019-10-06

트럼프의 임기응변식 ‘막말 정치’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 될 것으로 예측한 사람은 우리나라에서 드물었다. 그는 미국 중하층 백인들의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되어 ‘미국 우선주의’ 정치를 활발히 펼치고 있다. 그러나 임기 초부터 트럼프의 절제되지 않는 발언은 세계인들을 불안케 하고 있다. 무슬림에 대한 비하 발언에서부터 최근 우크라이나 대통령에 대한 전화는 트럼프를 탄핵의 궁지로 몰아가고 있다. 트럼프의 한반도 문제에 관심은 미국의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높다. 그러나 그의 정제되지 않은 한반도 관련 발언은 그의 신뢰를 더욱 떨어뜨리고 있다.트럼프는 북한 김정은에 대한 평가도 여러 차례 바꾸었다. 그는 임기 초 핵실험을 강행하는 김정은에게 ‘작은 로켓 맨’으로 비하하였다. 트럼프는 ‘독재자’ 김정은을 이제 ‘좋은 친구’라고 부르고 있다. 그는 북한을 ‘화염과 분노’ 국가에서 ‘엄청난 발전 가능 국가’로 치켜세우고 있다. 물론 흥정의 달인답게 김정은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이려는 술책이다. 하노이 회담 결렬 후 트럼프는 김정은의 우호적인 편지를 직접 소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북미 핵 협상이 성공할지는 여전히 의문이다.트럼프는 그의 북미 협상의 성과를 지나치게 선전하고 있다. 그는 북미 간 대화를 하지 않았다면 ‘한반도에서는 벌써 전쟁이 났을 것’이라는 발언도 하였다. 내년 대선을 앞둔 시점의 발언이지만 북미 협상이 없었다고 한반도의 전쟁이 일어났을 것으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트럼프는 한반도 평화를 위한 그의 역할을 노벨 평화상 감이라는 발언을 수차례 하였다.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오바마보다 자신의 역할이 크다는 것이다. 그는 노벨 평화상위원회의 심사가 공정하지 못하다고 비판하였다. 북한과의 비핵화 협상도 타결되지 못한 시점의 그의 발언은 아무래도 지나치다.트럼프는 주한 미군의 방위비 분담을 과도하게 요구를 하고 있다. 지난해 10억달러(1조3천억원)의 5배인 50억달러를 요구하고 있다. 그가 ‘안보 무임승차론’을 내세워 기존 방위비의 5배나 요구하는 것은 협상의 기본 상식에도 어긋난다. 트럼프는 지난번 한미 합동훈련 중인데도 ‘돈이 많이 드는 한미 합동훈련은 필요 없다’는 말까지 하였다. 미군의 합동훈련 비용까지 한국 측에 전가하려는 내심일 것이다. 다시 한미 방위비 협상은 시작되었다. 트럼프의 이러한 무리한 요구가 관철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트럼프의 잦은 이러한 막말은 그의 한반도 평화 노력을 의심케 한다. 세계 지도국 행세를 하는 미국 대통령의 막말은 그의 정치 품격을 떨어뜨린다. 얼마 전까지 같이 일했던 안보 특보 존 볼턴에 대한 비난 발언도 상식에 어긋난다. 부동산 재벌 출신 트럼프의 정제되지 않은 즉흥적 발언은 결국 트럼프식 비즈니스 정치의 화신일 것이다. 그의 변질된 미국식 실용주의적 사고인 그의 발언은 그에 대한 불신을 더욱 증폭시킬 뿐이다. 트럼프의 이러한 정치를 이해하려면 그의 공저인 ‘거래의 기술’부터 읽어야 한다. 트럼프의 이러한 처신이 미국의 내년 대선에서 다시 먹혀들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2019-09-29

‘9·19 평양 공동 선언 1주년 학술대회’ 참관기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지난 18일 서울 앰베서더호텔에서 열린 통일연구원 주최 국제학술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과거 재직시절 학술대회와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다. 이번 학술 대회에는 3개 세션으로 구성되어 국내 학자 뿐 아니라 미국의 학자, 언론인들이 대거 참석하였다.제 1세션은 ‘9·19 평양 공동 선언의 의의’라는 주제의 발표가 있었다. 미국은 사회과학원의 레온 사갈 등 4명이, 한국에서는 김갑식 통일연구실장 등 전문가 3명이 발표하였다. 사갈은 지난해 2018년 평양 공동 선언의 후속 합의서인 남북 군사 합의문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과거 남북의 상호 억지력 강화가 결국 연평해전이나 천안함 폭침 등 치명적인 군사적 충돌을 초래했음을 상기하였다. 그는 9·19 남북 군사적 합의문이 북미 군사적 신뢰구축 조치(CBM)를 위한 ‘잠정적 협정’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제 2세션은 ‘9·19 평양 공동 선언이후 군사 합의와 교류 협력 분야의 성과와 과제’에 관한 진지한 토론이 있었다. 미국 군축·비확산센터 선임국장인 알렉산드라 벨은 앞으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참여하는 협상 당사자들이 지켜야 할 자세와 원칙을 제시하였다. 벨은 ‘작은 승리를 추구 하라’‘소통을 확대하라’‘외부의 압력에 유의하라’는 협상 성공을 위한 가이드 라인를 제공하여 참석자들의 관심을 모았다. 그의 주장은 앞으로의 북미 및 남북 협상 참여자들에게 일종의 기술적인 팁을 제공한 셈이다.제 3세션에서는 ‘북한 비핵화에 대한 상응 조치’에 관한 진지한 토론이 있었다. 북한 당국은 미국과의 비핵 협상에서 언제나 확실한 대가를 요구하고 있다. 하노이 북미 협상이 결렬된 것도 이 대가나 보상에 대한 합의를 구하지 못한 결과이다. 특히 미국의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 로버트 아인혼은 북미 비핵화 협상의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완전한 비핵화의 시한과 방식은 뒤로 미루고 핵 동결 수준인 북미간의 잠정적 합의(interim agreement)를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 같은 주장은 북한의 사실상의 핵보유국을 인정하는 형식이 됨으로써 우리로서는 수용하기 힘든 점이 문제이다.여하튼 이러한 학술 대회는 과거의 고답적인 학술 행사와 다른 형식임이 분명하였다. 발표자들도 학자들만이 아닌 이 분야의 전문 언론인이 패널리스트로 참석한 점이 눈길을 끌었다. 특히 미국 트럼프의 대북 정책이 ‘선 비핵화와 차후 보상’이라는 리비아식 방식을 탈피하여 ‘새로운 방식’이 제시될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것이 북한이 하노이 이후 제시한 미국에 대한 ‘새로운 셈법’에 대한 반응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번 학술 대회는 작년 9·19 선언 이후 교착된 남북관계와 북미 협상을 예진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으며, 통일부 장관 등 정책 결정자들이 참여하여 우리의 정책 결정에 상당히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2019-09-22

조국 법무장관의 검찰개혁은 성공할까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으로 여야 정치권의 갈등이 초래되고 있다. 그 파장이 곧 수습될지 오래갈지는 현재로서는 예측키 어렵다. 여권이 내세운 그의 법무장관 기용배경은 그를 통한 검찰개혁에 두었다. 청문회 전부터 제기된 조 장관 딸의 논문 1저자 등재, 동양대 총장상 의혹, 사모 펀드 의혹 등은 야권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찬반양론이 비등한 가운데 대통령은 검찰 개혁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장관 임용을 강행해 버렸다. 조국 법무장관의 검찰 개혁은 현재로서는 예측하기 어렵지만 상당한 진통이 따를 것임은 분명하다.이 나라 검찰 개혁의 당위성은 누구나 인정한다. 과거 군부 독재시절 보안사나 국정원처럼 특정 기관이 권력을 독점하던 시절은 이제 끝났다. 검찰의 권력이 견제 장치 없이 행사되는 것은 비정상적인 상황이다. 검찰이 정권의 입맛대로 권력을 행사한다면 이는 ‘정치 검찰’로 비난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공수처를 신설하고 검경의 합리적 역할 분담은 검찰개혁의 핵심 사안이다. 그 개혁의 정당성은 인정할 수 있으나 그 절차와 방법에는 아직 쟁점이 많다.조국 장관의 기용은 검찰 개혁을 검찰 자체 개혁에만 맡길 수 없다는 대통령의 결심이 작용한 결과이다. 그간 검찰 출신 장관의 셀프 검찰 개혁에는 언제나 한계가 따랐다. 과거 노무현 정권에서도 대통령의 의욕적인 개혁 의지만으로 검찰 개혁은 성공하지 못했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조정하려는 검찰 개혁안은 결국 검찰의 기득권 포기가 선행되어야 한다. 지난번 법무장관과 행정안전부 장관이 합의한 검찰 개혁안이 검찰개혁의 토대가 되었다. 대통령이 야당 등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조국을 장관으로 기용한 것은 검찰 개혁의 절박성 때문이다.문재인 정부와 조국 법무장관의 검찰개혁은 과연 성공할 것인가.검찰 개혁을 주도하는 조국 법무장관은 두 가지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먼저 검찰 내부의 반대와 조직적 저항을 극복하는 문제이다. 조직에 충성한다는 윤석열 총장이 검찰 조직의 기득권을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검찰은 이미 청문회 전부터 조 장관 임용을 거부하는 반응을 보였고, 장관 부인까지 전격적으로 기소해 버렸다. 조국 장관은 취임 직후 검찰개혁 추진단 구성을 지시하고, 법무검찰개혁위원회를 통해 강력한 개혁 의지를 밝혔다. 조국 장관이 검찰내부를 설득하고 동의를 구하는 과제가 검찰 개혁의 성패가 달려 있다.다음으로 검찰개혁은 국회의 입법화 과정을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 청문회과정에서부터 자유한국당은 조국의 장관 임명을 결사반대했으며 불신임 결의안까지 제출할 전망이다. 공수처 신설과 검경의 수사권 조정을 골자로 하는 검찰 개혁 법안은 이미 패스트 트랙에 올려져 있다. 내년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검찰 개혁에 대한 입법화는 야당의 엄청난 반발을 초래할 것이다. 조 법무 장관은 이러한 검찰 내부와 정치권의 합의라는 내외의 압력을 동시에 극복해야 할 과제 앞에 서 있다. 장관 부인이 기소되고 본인의 도덕적 신뢰까지 손상된 장관이 검찰개혁의 동력을 유지할 것인가. 현재는 검찰의 수사 등 사태의 추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다.

2019-09-15

북한의 대미 협상 전술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 정치학박한식 교수를 만난 지는 상당히 오래되었다. 20여 년 전 어느 세미나에서 한반도 문제에 대한 그의 혜안은 상당히 참신하였다. 미국 조지아대학 교수이며 대구 출신인 그는 아직 고향 사투리를 그대로 쓴다. 세계적인 북한 문제 전문가인 그는 카터와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을 주선하기도 하였다. 그는 북한을 50여 차례 방문하여 북한 당국의 입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최근 그의 북한 관련 언급은 우리들에게 상당한 시사점을 주고 있다.북한 당국은 종래의 통미통남(通美通南) 정책에서 다시 통미봉남(通美封南) 정책으로 회귀하였다. 북한이 최근 우리의 대북화해 협력 정책을 무시하고 남한 배제 정책을 쓰는 이유이다. 그것은 우리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강한 불신에서 비롯되었다. 김정은은 작년 9월 3차 평양 정상회담에서 문 대통령에게 파격적인 예우를 했다. 그러나 북한은 문재인 정부가 ‘우리끼리 정신’을 무시하고 미국의 대북 정책에 종속되었다고 비난한다. 북한이 남쪽을 향해 ‘오지랖 넓은 중재자’로 비판하면서 문 대통령의 8·15 경축사까지 ‘삶은 소대가리도 앙천대소할 노릇’이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이유이다.북한은 북미 협상을 앞둔 시점에서 미사일 시험 발사 등 종래의 벼랑끝 전술을 강화하였다. 그것은 한미 합동 군사 훈련에 관한 북한식 불만의 표시이며, 대미 협상력을 높이기 위한 압력이다. 물론 여기에는 북한이 상대적 열세인 재래식 무기를 미사일로 보완한다는 의도도 깔려 있다. 이는 북한이 단거리 미사일 발사를 통해 자신들의 기술력을 세계에 과시하고, 이의 제3세계 판매전술도 고려한 조치이다. 트럼프는 북한의 단거리 미사일 시험은 대북제재에 해당되지 않으며, 경비가 많이 드는 한미 합동 군사 훈련도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 역시 트럼프식의 대북 협상용 카드일 뿐이다.북한은 궁극적으로 체제 안전 보장 전술을 구사하고 있다. 김정은은 북한 체제의 안전성 보장이 전제되지 않으면 결코 핵을 포기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사실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와 대북 제재해제는 단번에 합의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북한과 미국이 일괄 타결론과 단계론적 타결론으로 대립하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북한 당국은 대북 경제 제재 해제만으로 결코 비핵화를 실천하지 않을 것이다. 북한은 북미 평화 협정체결과 대사급 외교 관계 수립을 비핵화의 전제로 본다. 북한은 어떠한 진통을 겪더라도 체제의 안전 보장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의 이러한 대미 협상 전술은 트럼프와는 협상의 셈법이 다르다. 트럼프는 어느 협상에서나 미국 이익의 극대화를 최고로 우선한다. 그는 정치나 외교를 그의 경험세계인 비즈니스 개념으로만 파악한다. 트럼프가 최근 미일 동맹을 강화한 것도 미국 군산복합체의 이익확보를 위함이다. 그는 미국 이익에 배치되면 언제든지 협상의 결과를 파기할 수도 있다. 트럼프가 이란과 체결한 핵 협정을 폐기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에 비해 김정은의 최대 관심사는 북한 정권의 안전 보장이다. 북한당국이 경제적 제재 해제만으로 핵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물론 북한의 협상 전술도 고정된 틀은 아니며 상당한 가변성이 있다.

2019-09-08

경술국치일에 다시 보는 ‘한일합방 문서’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 정치학지난 8월29일은 우리나라가 일본에 완전히 나라를 빼앗긴 수치스런 날이다. 1910년 8월22일 체결된 8개항의 합방 문서가 8월29일부터 효력이 발생한 것이다. 한일 합방조약 전문 1조에는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全部)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는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한다”고 되어 있다. 나머지 조항은 합방 후 한국 왕실에 대한 예우, 합방 훈공 한인의 예우, 한인들의 관리 채용 등 식민화를 위한 사탕발림식 내용이 들어 있다.일본은 치밀한 계획을 통해 조선의 국권을 강제 탈취하였다. 일본은 1905년 을사조약을 통해 외교권을 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내정 간섭을 시작하였다. 1907년 고종을 강제퇴위시키고, 행정각부에 일본인 차관을 임명하여 실질적인 내정을 장악하였다. 뒤이어 군대를 강제해산하고 사법권과 경찰권까지 탈취하여 1910년 한일 합병 조약을 완성케 한 것이다. 합방문서의 전문에는 ‘양국의 상호 행복을 증진하고 동양의 평화’를 위해 병합조약을 체결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말미에는 총리대신 이완용과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의 서명이 들어 있다. 임금의 옥쇄도 없는 이 엉성한 문건이 식민 통치의 근거가 된 것이다.이러한 경술국치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경술국치는 일본의 강점이라는 외재적인 원인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매국노 이완용과 송병준에게만 책임을 돌릴 수 없다. 당시의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의 활동은 광무 정권의 외교 노선과 입장을 달리하였다. 애국 계몽세력과 위정척사 유생들 간에도 민족 문제로 갈등하였다. 갑오개혁과 광무개혁은 실패하고 정약용 김옥균의 개혁정치는 이상에 지나지 않았다. 한말의 무능한 국왕과 관료 부패와 대립이 경술국치를 자초한 셈이다. 우리는 한말의 정세를 거울삼아 일본의 경제 압박을 여야가 합심하여 대처해야 한다. 오늘도 우리에게 백배 사죄해야할 가해자 일본은 반성은커녕 경제 문제로 우리를 겁박하고 있다.아베의 경제제재는 후발국가인 한국의 전자, 통신 산업 등이 일본을 앞지른 것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다. 그들은 화이트 리스트 배제를 전략물자의 유출 등 우리에 대한 안보 불신을 이유로 들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 정부의 지소미아 폐기는 지극히 당연한 조치이다. 우리 국민들이 아베의 오만불손한 태도에 분노하면서 일본 상품에 대한 불매운동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일본이 다시 국제법 위반 운운하면서 우리 정부를 비난하는 것은 자가당착일 뿐이다. 우리는 차제에 일본 의존적인 경제부문에 과감히 투자하여 새로운 경제 기술 프레임을 서둘러 구축해야 할 것이다.우리는 극일을 위해서 109년 전의 경술국치를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이 나라의 젊은 세대들은 경술국치의 의미마저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다. 지자체의 조례에는 엄연히 조기 달기를 규정하고 있지만 관청에서도 조기게양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나라에는 이미 46개의 국가기념일이 제정되었지만 아직 경술국치일만은 빠져 있다. 경술국치일을 우리가 ‘국민 각성의 날’로 제정해야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역사를 잃어버린 민족은 희망이 없다는 말을 다시 명심할 시점이다.

2019-09-01

와다 하루키의 한일 문제의 참된 해법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와다 하루키(和田春樹)는 1938년 오사카에서 태어나 1960년 도쿄(東京)대학 서양사학과를 졸업했다. 1966년부터 도쿄대학 교수로 재직했으며 1998년에 정년퇴임했다. 러시아사와 북한 현대사 연구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학자로서의 활동뿐 아니라 베트남전 반대 운동, 한국 민주화운동과의 연대 등 행동하는 진보 지식인이다. 2010년 제4회 후광 김대중 학술상, 2012년 DMZ 평화상을, 이번에는 만해평화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북조선: 유격대국가에서 정규군국가로’‘러일전쟁과 대한제국’등이 있다.그는 지난주 ‘한국은 일본의 적인가?’라는 화두를 통해 일본 아베 정권의 한국에 대한 무역 보복 조치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는 벌써 일본인 8천명 이상이나 서명을 받았는데 그중 3천500명이 그 사유까지 밝히면서 서명을 했다고 한다. 그는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하여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로서는 반길만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아베의 횡포에 대해 노 재팬(No Japan)이 아닌 노 아베(No Abe)를 외쳐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본에는 우리와 뜻을 같이 하는 양식 있는 국민이 상당히 많다. 아베 정권이 극우 정치와 헌법 개정을 통한 패권 국가 지향을 반대하는 국민이 많다는 뜻이다.이런 상황에서 하루키 교수의 주장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상당히 크다. 그는 1965년 한일 협정은 정치적 타협의 산물로 그 정당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협정 체결 시 일본 정부는 1910년 한일 병합을 정상적 합의로 보았지만 우리 한국은 부당한 강제 병합이라는 입장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일본이나 한국 학자들의 ‘식민지 근대화론’에는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한다. 일제 시 일본의 교육이나 산업 투자는 조선 근대화의 촉진제가 아니라는 입장이다. 그는 일제의 식민지 교육은 조선의 동화, 말살 정책이며 한국인들에게 큰 문화적 정신적 상처를 남겼다는 것이다.그는 1993년 위안부 문제에 관한 고노(河野)담화나 1995년 식민지 지배를 사과한 전 총리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담화를 적극 지지하는 입장이다. 최근 일본의 경제 제재의 빌미가 된 강제 징용의 개인의 청구권 요구도 정당하다는 것이다. 그는 종군 위안부가 1명도 없었다는 일본의 주장은 일본 보수층에서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시 전시 종군위안부는 다양한 경로로 모집되었으며 일본군의 강제성은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당시 군 위안소는 강간 센터의 역할을 했으며 군의 강제성 인정은 상식이라는 것이다.그는 경색된 한일 관계의 해결책으로 아베의 대한(對韓)정책부터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양식 있는 양국 국민 사이의 유대가 강화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양식 있는 양국의 시민단체의 연대와 협력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실 한국인 강제 징용자 보상 문제도 일본의 양식 있는 변호사들이 동참하여 한국 대법원의 승소를 이끌었다. 와다 하루키 교수는 ‘정권은 일시적이지만 국민관계는 영원하다’는 말을 남겼다. 우리도 한일관계의 경색된 국면을 풀기 위한 양국 시민 연대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2019-0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