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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경험 자랑하기 전에 귀부터 열어라

등록일 2025-12-21 15:42 게재일 2025-12-22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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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국 고문

영화가 시작되기 전 ‘대한늬우스’가 상영되던 시절이 있었다. ‘대한뉴우스’로 표기를 바꾼 박정희 시대에는 경제기획원의 ‘월례 경제 동향 보고’가 자주 등 장했다. ‘땡전뉴스’의 원형인지 모른다. 그런데도 아직 많은 사람이 대통령에게 그런 모습을 기대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평검사들과의 생중계 대화를 시도했다. 이재명 대통령의 생중계 ‘업무보고’도 비슷한 노력으로 보인다. 

 

지난주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이 대통령 국정 지지율이 55%로 일주일 전보 다 1% 떨어졌다. 오차율 범위 안이다. 그런데 긍정 평가를 한 가장 큰 이유로 ‘소통·국무회의·업무보고’(18%)를 꼽았다. 한국갤럽은 “부처별 업무보고 생중계 영향으로 추정된다”라고 분석했다.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조) 생중계 업무보고가 일단 성공적이었던 셈이다. 

 

‘불통’이라고 비판받은 대통령이 많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비선 문제가 국민적 분노를 불러일으킨 것은 ‘불통’에 대한 불만과 겹쳤기 때문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하는 말은 행동과 일치하지 않아 고구마 같았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일방적으로 쏟아내기만 했지, 들을 줄을 몰랐다. 공감 능력 부족으로 제 풀에 철벽을 쳤다. 

 

일 잘하는 사람을 과장 때부터 발탁해 냈던 박정희 전 대통령, 깨알 같은 글씨로 빼곡히 적어넣은 수첩에 적으며 질문하던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추억 이 국민 가슴에 남았다. 이 대통령의 업무보고는 그런 기억을 소환하며 공감을 얻었다. 그렇지만 번번이 정치적 논란에 휘말렸다. 

 

이 대통령의 업무보고 생중계는 무엇을 노렸을까. 국가 정책을 잘 다듬기 위해서, 어리석은 공직자를 가르치기 위해서, 아니면 공포로 공조직을 장악하기 위해서…. 의도가 무엇이든 겉으로는 전임 정부가 임명한 공직자를 정리할 명분 쌓기로 비치게 했다. 

 

이학재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과의 공개 설전이 너무 부각됐다.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은 “정치적 입지를 쌓기 위해 탄압의 서사를 만들고” 있다고 비난 했다. 이 사장의 항변 방식이나, 범위가 해명의 수준을 넘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대통령의 언행 역시 정치적 퍼포먼스로 비친다. 

 

업무보고를 생중계로 공개한 것이나, 보고 때마다 부각한 이슈들이 대중적 인기를 겨냥하고 있다는 의심을 떨치기 어렵다. 성남시장 시절부터 그의 장기였던 ‘사이다 발언’이 이어졌다. 주사가 할 일이 있고, 장관이 할 일이 따로 있다. 더구나 대통령은 국정의 방향을 제시하고, 큰 흐름을 잡아가는 사람이다. 

 

만기친람(萬機親覽)은 왕조에서나 하던 일이다. 아니, 왕이라도 경계해야 할 태도다. 더구나 민주 정부는 역할 분담과 협력이 정도다.  대통령이 모든 문제 를 다 잘 알 수도, 마음대로 할 수도 없다. 독재와 다르다. 

 

대통령은 입보다 귀가 커야 한다. 대통령이 아는 체하면 전문가가 입을 다문다. 경청하고, 조언을 구하는 것이 관심이고, 힘을 실어주는 방법이다. 대통령이 깨알같이 지시하면 뒤집기 어렵다. 더 미련한 일은 권력자의 개인적 경험을 일반화해, 검증도 없이 국가 정책에 적용하는 것이다. 20년 전, 한 도시에서 경험한 일이라도 국정 파악에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조건은 다르다. 바뀌고, 개선된 게 한둘이 아니다. 20년 전에 칭찬받았다고, 그대로 따르라는 건 시대착오다. 

 

선거 공약은 표부터 생각한다. 국가 정책이 그래서는 곤란하다. 더구나 고대사를 대통령이 어떻게 평가하나. 전문 분야는 전문가들이 공정하게 논의할 환경만 만들어주면 된다. 대통령이 첨단반도체 설계도까지 직접 그릴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 것 아닌가. 역사가들이 어떻게 판단하든, 외교적 파문을 먼저 생각하는 게 대통령의 몫이다. 

 

후보가 되면 ‘버스 요금이 얼마냐’라는 식의 질문에 시달린다. 그것으로 족하다. 당선된 뒤 정책을 논의하는 자리를 재치문답으로 이어갈 수는 없다. ‘책갈 피 사이의 달러’ 논란은 국회 상임위의 퍼포먼스를 닮았다. 대통령에게 ‘이건 몰랐지’는 불필요하다. “참, 말이 기십니다”라는 식의 모욕도 대통령의 어법으론 부적절하다. 자리에 걸맞은 절제가 아쉽다. 

▲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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