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어 ‘르상티망’의 사전적 의미는, 불공평한 세상에 대한 패배주의적 분노나 아등바등한들 늘 제자리 걸음하기도 벅찬 삶의 허무함에 대한 억압적 감정이다. 약자들의 강자들에 대한 르상티망은, 질투나 시기심, 원한 감정 또는 분노다. 강하다는 것은 도달하고 싶은 것이면서, 동시에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된다. 강자와 약자 사이를 방황하는 존재. 이것이 인간이다.
강자는 스스로를 증명한다. 그는 비교하지 않고, 변명하지 않으며, 자신이 가진 힘을 세계로 흘려보낸다. 그 힘은, ‘폭력적일 필요도 없고, 지배적일 필요도 없다.’ 창조하고, 책임지고, 감당하는 태도 자체가 이미 강함이다. 그러나 강함이 드러나는 순간 세계는 조용히 갈라진다. 약자는 증명할 꺼리가 없다. 그는 타인과 비교하며, 변명하며, 자신이 가진 원한 감정을 세계로 흘려보낸다. 겉으로는 강자를 미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대신, 정의를, 공정을, 평등을 말한다. 창조하지도, 책임지지도, 감당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약함이 드러나는 순간 강자는 조용히 지배당한다.
약자는 강자를 직접적으로 쓰러뜨릴 힘이 없다. 그래서 강함 자체를 문제 삼는 다른 방식을 택한다. 약자에게 강함은, 위험한 것, 부도덕한 것이다. 약자의 르상티망은 격렬하지 않다. 오히려 조용하며, 차분하고, 논리적이며, 도덕적이기까지 하다. 칼을 갈 일이 없다. 르상티망은, 찌르지 않아도 깊이 스며든다. 경쟁을 악으로, 탁월함을 의심의 대상으로 바꾼다.
약자는 묻는다. “왜 저 사람은 저 자리에 있는가?”라고. 때로는 정당한 이 질문에 르상티망이 개입되면 질문의 의미는 강자에 대한 단죄로 바뀐다. 약자는, 강자를, 아니 강함을 약화시키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 목적은 약자 스스로 강해지기 위함이 아니다. 약자가 원하는 것은 ‘아무도 강하지 않은 세계’다. 이곳에서는 비교할 필요도 없고, 열등감을 느낄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약자의 르상티망 속에서 강자는 서서히 지쳐간다. 이것이 약자가 강자를 약화시키는 방식이다, 강자의 힘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강함의 의미를 소진시킨다. 약자가 결국은 승리한다. 그러나, 승리의 축배를 들어도 약자는 행복하지 않다. 여전히 약자이기 때문이다.
르상티망은 단순한 원한 감정이 아니라, ‘책임지지 않으려는 의지’다. 르상티망에 공격당한 강자는 끊임없이 사과해야 한다. 이유 없이 미안해야 한다. ‘왜 더 가졌는지’ ‘왜 더 빨리 갔는지’ ‘왜 더 잘했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설명이 끝나면 또 다른 설명이 요구된다. 르상티망은 교묘하다. 언제나 선한 얼굴을 한다. 그러나 그 선함에는 기쁨, 웃음, 여유, 삶을 긍정하는 힘이 존재하지 않는다. 약자들이 무너뜨리고 싶은 강함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폭력적이지도 않고 지배하지도 않지만, 그토록 르상티망을 자극하는 강함의 근원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강자의 진정한 힘은 무엇인가?
돈 한 푼 없었고, 아무런 지배를 하지 않았던 부처와 예수는 강자인가 약자인가. 부처가 약자라면, 그가 강자에 대한 원한 감정이 있었을까. 예수가 약자라면, 그에겐 아무런 창조하는 힘도, 누구를 사랑하는 마음도 없었을까. 그대는 강자인가 약자인가.
/공봉학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