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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누나’, 세긴 세구나

등록일 2025-12-07 17:09 게재일 2025-12-08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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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국 고문

 “정치권에서 형, 형님, 누나, 누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선배 동료들을 살갑게 부르는 민주당의 일종의 언어 풍토다.” 박지원 민주당 의원이 지난주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그는 또 “동료 후배 의원들께서도 저를 의원, 전 대표보다는 대부분 거의 형님, 큰형님이라 부른다”라고 강조했다. 

 

박 의원이 이 글을 올린 이유는 분명하다. ‘현지 누나’를 비호하기 위해서다. 박 의원은 83번째 생일이 6개월이나 지났다. 그는 김대중 정부에서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다. 자칫하면 그의 사소한 언행이 김 전 대통령에게 누를 끼칠 수도 있는 처지다. 그때도 그랬느냐는 말을 듣기 십상이다. 그런 박 의원까지 나서서 ‘현지 누나’를 엄호하는 것을 보면, ‘세긴 세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동료 의원들끼리 ‘살가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나쁠 리가 없다. 그런 호칭이 굳이 민주당이나 호남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풍토도 아니다. 경북 출신인 한 대학 총장도 젊은 시절 만나는 사람마다 ‘형님’, 아니면 ‘아우님’이라고 부른다고 소문이 난 적이 있다. 친화력이 좋고, 마당발이라는 평가가 따랐다. 국민의 힘 정치인 중에도 ‘형님’이라는 호칭을 버릇처럼 내뱉는 사람이 적지 않다. 

 

정치인이 ‘형님’, ‘누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뻔하다. ‘공식적인 관계보다는 가깝게 지내자’는 제의다. ‘너무 야멸차게 원칙만 들이대지 말아달라’는 응석이다. 친 형님처럼 푸근하게, 친 누님처럼 따뜻하게 대해달라는 부탁이다. 좀 더 들여다보면 인사나 청탁을 잘 챙겨달라는 뜻이기도 하다. 남의 부탁은 몰라도 형님이나 아우 부탁은 들어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계산이 담겨 있다.

 

 ‘형님’이란 말을 정치인보다 더 잘 쓰는 집단이 ‘조폭’이다. 무슨 말을 하건 ‘형님’을 갖다 붙이는 게 조폭 어법이다. 개그맨들이 종종 그런 말투로 조폭을 흉내 내 관객을 웃기는 걸 본다. ‘형님’에는 논리가 없다. 명령과 복종뿐이다. 내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단순 무식’이 이 세계의 절대 규율이다. 

 

그러나 이런 관계가 정치권, 공직 사회에 얹혀지면 곤란한 일이 생긴다. ‘공(公)’과 ‘사(私)’가 비빔밥이 되는 것이다. 문진석 민주당 수석원내부대표가 김 남국 전 대통령실 디지털소통 비서관에게 보낸 문자는 이렇게 시작한다. “남국 아, 우리 중대 후배고···”. 같은 대학 동문이니 내가 챙기는 것이고, 너도 챙겨야 한다는 논리다.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업무와 관계없는 줄이 작동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자동차모빌리티산업협회는 민간단체다. 공직, 공공기관, 정부가 공식으로 관여하는 자리가 무수하다. 그런데, 이런 민간단체장까지 대통령실이 좌지우지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또 디지털소통비서관은 자동차산업과 관계가 없다. 인사 와도 거리가 멀다. 제1부속실장도 인사담당자가 아니다. 그렇지만 거대 여당의 원내 제2인자가 그런 줄을 잡고, 인사청탁을 했다. 대통령실 비서관도 ‘현지 누나’가 인사를 좌우하는 실력자라고 지목했다. 이걸 단순한 해프닝으로 덮을 수 있나.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여권 실세들이 모두 ‘현지 누나’가 민간협회장을 낙점해줄 수 있다고 믿었을까. ‘만사현통’이라는 시중의 소문만 믿은 건 아닐 것이다. 야당이 김현지 대통령실 제1부속실장을 국회로 부르자, 이재명 대통령은 그에게 문고리 권력을 맡겼다. 국회 출석을 회피할 수 있는 자리다. 문자 소동 끝에 김현지 실장은 “나는 아주 유탄을 맞았다”라며 억울해했다. 그렇다면 진즉 국회에 나왔어야 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최서원(최순실의 개명)으로부터 사소한 도움을 받다 비선 논란에 휘말렸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김건희 여사의 지나친 국정 개입을 감싸려다 제 발등을 찍었다. 권력에는 책임이 따른다. ‘비선(秘線)’은 권력은 휘두르는데, 책임을 지지 않는다. 무책임한 권력만큼 위험한 게 없다. 
 

이재명 대통령의 인재 풀은 매우 좁다. 성남 시절 지인이 아니면, 자기 사건 변호인들이다. 그 밑에서 돌아가는 모양도 ‘끼리끼리’다. 사적 관계에서 살갑고 정이 넘치는 건 좋다. 하지만 공적 영역은 다르다. 달라야 한다. 국정 운영은 더욱 그렇다.

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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