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 금봉리 소재 둘레 7.7㎞·면적 17만㎡ 성벽 ‘영남 최대’ 규모 1700년 전 성산가야 자취 남은 요새… 임진왜란 피란처 되기도
맑은 가을 햇살 아래, 발걸음이 유적지를 향한다. 이런 날이면 마음 깊은 곳에서 역사의 자취를 더듬어보고 싶다. 성산가야, 혹은 벽진가야라 불리던 고대 왕국의 흔적을 따라, 이름만으로도 여운이 남는 독용산성(禿用山城)을 오른다.
산성은 경북 성주군 가천면 금봉리 산 43번지에 자리한다. 금봉리 숲을 지나 오왕사를 거쳐 오르는 산길은 굽이굽이 이어진다. 어느새 독용산성 안내판이 모습을 드러낸다. 가야의 시간으로 들어서는 문턱이다.
‘독’(禿)은 ‘민둥’이라는 뜻이다. 이름처럼 예전에는 나무 한 그루 없는 산이었을지 모른다. 숲이 짙고, 돌길을 따라 걷다 보면 웅장한 누각이 눈앞에 나타난다. ‘관성루’라 새겨진 현판이 위엄을 더한다. 이곳이 독용산성의 동문이다.
독용산성은 포곡식 산성이다. 봉우리를 중심으로 여러 계곡을 따라 성벽이 둘려 있다. 둘레 7.7km, 면적 약 17만㎡로 영남 지방에서 가장 큰 규모다. 성안에는 물이 풍부해 장기전에 적합한 요새였으며, 축성 시기는 약 1700년 전으로 추정된다.
성벽은 화강암으로 쌓았다. 아래에는 큰 돌을, 위로 갈수록 작은 돌을 채워 단단히 다졌다. 빈틈없는 구조 속에서 가야인의 노동과 지혜가 느껴진다. 복원된 동문과 일부 성곽 외에는 원형이 많이 남지 않았지만, 여전히 장엄하다.
성에는 일곱 개의 포루와 아치형 동문, 수구문, 남소문이 있다. 성내에는 연못 네 곳과 우물 두 곳이 자리한다. 일제강점기 발굴 당시 군기고에서는 전투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중 쇠 창과 갑옷, 삼지창, 말안장은 당시 치열했던 옛 전장의 기운을 전한다.
임진왜란 때 피란민들이 왜적을 피해 이곳에 숨었다고 전해진다. 숙종 원년(1675년) 경상도 순찰사 정중휘가 4개월 동안 성을 개축했고, 1995년에는 경상북도 기념물 제105호로 지정되었다. 해방 전후 성내에는 40여 호의 민가가 있었다. 1960년대 철거되었지만, 한때 이곳에도 삶이 이어졌다는 사실이 놀랍다.
현재의 관성루는 1997년 성주군이 복원 사업을 추진하며 세운 것이다. 아치형 동문은 옛 돌과 새 돌의 색이 다르지만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누각에 올라서면 성주의 산세가 수채화처럼 펼쳐지고, 뒤편에는 조선시대 선정비와 불망비가 가지런히 서 있다. 세월은 흔적을 지워도 정성은 돌에 남는다.
성곽 오른쪽 길을 따라 걷는다. 복원된 구간은 발걸음이 편하지만, 절벽 끝에 서면 아찔하다. 다리가 후들거려 평탄한 길로 우회한다. 성벽 옆으로 난 길은 돌에 스민 시간이 손끝에 닿는다.
민둥산일 줄 알았던 독용산은 지금 단풍으로 물든 숲이다. 가야의 흔적이 남은 이곳에서 한나절을 보내니 산이 품은 시간이 내 마음에도 내려앉는다. 성산가야의 백성들이 이 산성에 기대어 삶을 지켰던 간절한 마음을 떠올리면 가슴이 뭉클하다. 그들은 이곳에서 삶을 지켰고, 우리는 그 기억을 지켜야 한다.
전쟁 없는 세상, 평화로운 미래를 그리며 산길을 내려온다.
/김성문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