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기자 단상
“가을비 한 번으로 농사 반을 잃는다” “가을비 하루에 곡식이 열섬 준다”는 속담은 농부의 가슴에서 나온 말이다. 수확을 앞둔 들녘에 비가 내리면 알곡은 젖고 낱알은 썩는다. 그래서 가을비는 수고를 앗아가는 원수였다. 그런데 요즘의 가을비는 예전과는 다르다. 하루 이틀로 그치지 않고 장마처럼 길게 내린다. ‘가을장마’다.
올해도 한여름의 폭염이 끝나자마자 가을장마가 들이닥쳤다. 연일 이어지는 비구름에 벼는 눕고, 과수는 떨어지고, 콩밭은 진흙 속에 잠긴다. 기후변화가 계절의 질서를 뒤흔들고 있다. 예전에는 장마가 7월의 한철이었지만, 이제는 10월까지 이어진다. 기온이 높아지면서 대기 중 수증기가 늘고, 북태평양 고기압이 늦게 물러나기 때문이란다.
가을장마의 과학적 배경은 이렇다. 여름철의 북태평양 고기압이 평년보다 오래 지속되며, 그 북쪽에서 찬 대륙성 공기와 부딪쳐 정체전선을 만든다. 이 전선이 한반도 상공에 머무르면 남쪽의 따뜻한 수증기가 계속 유입되어 장마와 유사한 강수 패턴이 형성된다. 또한 지구온난화로 인해 대기층이 더 많은 수증기를 품게 되면서 한 번의 강우량이 과거보다 크게 늘었다. 기상청 분석에 따르면 최근 10년 사이 가을철 강수량은 평균보다 20% 이상 증가했고, 장마 기간도 1~2주 길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런 환경의 변화는 단순히 일시적인 이상기후가 아니다. 농사는 계절의 리듬에 맞춰 흙과 하늘이 조화를 이루는 일이다. 그 리듬이 깨지면, 모든 농작물의 파종 시기, 수확 시기, 병충해 방제 계획이 모두 틀어진다. 기계화로 노동은 줄었지만, 자연의 변덕 앞에서는 인간의 계산이 늘 뒤처진다.
가을장마는 농작물의 품질에도 직격탄을 준다. 벼는 낟알이 여무는 시기에 과습을 만나면 미질이 떨어지고, 과일은 당도가 낮아진다. 곰팡이와 병충해가 번식하면서 저장성도 크게 줄어든다. 결국 시장의 가격 불안정으로 이어지고, 소비자 역시 그 피해를 나눠 지게 된다.
이제 우리는 ‘기후위기 시대의 농업’을 고민해야 한다. 정부의 대책도 일회성 재난지원에 머물 것이 아니라, 기후 패턴의 변화에 맞춘 품종개발과 농업 인프라 재편으로 나아가야 한다. 논과 밭의 배수 체계, 저장시설의 확충, 재해보험의 현실화가 모두 시급하다. 무엇보다 농업을 단순한 산업이 아니라 생태적 기반산업으로 다시 바라봐야 한다.
가을장마가 길어질수록 ‘하늘이 도와야 농사가 된다’는 말이 다시 떠오른다. 인간의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자연의 균형이 무너지면 먹거리의 안정은 없다.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의 조화를 되찾는 일, 그것이 기후위기 시대의 새로운 농정의 출발점이다. 물기 품은 나락, 알갱이가 털어지지 않는 들깨. 설익은 콩깍지를 바라보는 농민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하다.
/석종출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