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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 년에 걸친 슈퍼리치의 탄생

윤희정 기자
등록일 2025-08-12 17:59 게재일 2025-08-13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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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고의 부는 어디서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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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창 펴냄, 귀도 알파니 지음, 인문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부자들은 찬사와 분노, 관심의 대상이 돼왔다. 전염병과 기근, 전쟁과 금융 위기 속에서 어떤 이는 몰락했고, 또 다른 이는 부를 축적했다. 슈퍼리치는 단순히 재산이 많은 부자를 넘어, 시대를 주도하고 제도를 구축하며 때로는 국가보다 막대한 자본을 소유한 존재였다. 

중세의 왕족과 귀족, 근대의 상인과 금융인, 현대의 테크 재벌까지, 수천 년에 걸친 슈퍼리치의 탄생과 진화, 그들이 사회와 맺어온 복잡한 관계를 탐구한 신간 ‘최고의 부는 어디서 오는가’(미래의창)가 출간됐다. 

이 책은 단순히 특정 시대의 억만장자를 나열하는 부자 열전이 아니다. 경제사학자인 저자 귀도 알파니는 “누가 부자가 되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각 시대의 경제·사회 구조를 분석하며, 부의 원천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추적한다. 중세의 왕족과 귀족, 르네상스 시대의 상인과 금융인, 산업 자본가, 현대의 테크 억만장자에 이르기까지, 부자들은 단순한 자산 보유자가 아니라 제도와 권력을 움직이며 사회를 형성해온 주체였다.

로마 시대에는 여섯 명의 부자가 아프리카 땅의 절반을 소유했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팔라스는 당시 황제 네로보다 더 큰 부를 자랑했다. 11세기 잉글랜드의 귀족 앨런 더 레드의 토지 수익은 국민 총 순소득의 약 7.3%에 달했으며, 19세기 제이 굴드는 미국 철도의 15%를 장악했다. 현대의 대표적 부자인 제프 베이조스의 경우, 2020년 3월부터 8월까지 급증한 재산만으로도 아마존 직원 8만7600명에게 각각 10만 달러의 보너스를 지급할 수 있을 정도로 막대한 부를 쌓았다. 이처럼 부의 집중은 역사적으로 지속됐으나, 산업혁명 이후 그 규모는 기하급수적으로 확대됐고, 21세기 들어 다시 한번 정점에 도달했다.

‘최고의 부는 어디서 오는가’에 따르면, 19세기 중반까지 유럽의 슈퍼리치는 대부분 귀족 출신이었으나, 20세기에는 자수성가한 기업가와 금융인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최근 수십 년간 상속을 통한 부의 세습이 다시 증가하며, 상위 0.1%의 부 집중도는 1929년 대공황 직전 수준을 넘어섰다. 흑사병과 세계대전 시기를 제외하면, 부의 불평등은 수 세기에 걸쳐 점차 심화됐다. 유럽은 14세기 흑사병 이후 일시적으로 계층 간 격차가 완화됐으나, 15세기부터 불평등이 재차 확대됐다. 

특히 산업혁명과 금융업의 성장으로 귀족 대신 기업가와 금융인이 새로운 슈퍼리치로 부상하며, 이들은 단순한 부자가 아닌 제도적 권력으로 자리 잡았다. 반면 미국은 건국 초기 귀족과 세습 특권이 없었으나, 19세기 산업화와 철도 개발, 금융 시스템 발전으로 부의 편중이 가속화되었다. 오늘날 미국은 전 세계 슈퍼리치의 절반 이상을 배출하며, 극심한 불평등 국가로 꼽힌다.

역사적으로 부자는 사회적 책임과 도덕적 검열의 대상이었다. 중세 수도사들은 부를 죄악시했고, 공익보다 사익을 우선시하는 자는 추방당했다. 그러나 전염병, 전쟁, 기근과 같은 위기 시 부자들은 기부, 기반 시설 건설, 대출 제공 등을 통해 공동체의 구원자 역할을 자처하며 사회적 정당성을 얻었다. 그러나 현대의 부자들은 팬데믹과 금융 위기 속에서도 자산을 증식시켰으나, 공동체 책임을 외면하고 있다. 알파니는 “부자들이 사회적 고통에 무감각하거나 이를 이용해 이익을 추구한다는 인식이 퍼질 때, 사회는 불안정해지고 폭동으로 이어진다”고 경고한다. 심지어 일시적 증세조차 ‘부자 공격’으로 왜곡되며, 공공 세금으로 손실을 메우는 역설적 상황까지 발생하고 있다.

과거 부자들이 ‘책임 있는 계급’으로서 정당성을 확보했다면, 오늘날 그 기반은 흔들리고 있다. “세금보다 기부를 선택하겠다”는 말은 단순한 선언이 아니다. 부자들은 여전히 기부를 통해 도덕적 우위를 점하려 하지만, 정작 납세 의무는 회피한다. 저자는 선의와 의무 사이의 역사적 논쟁을 파헤치며, 권력과 사회계약의 변화를 드러낸다. 이 책은 과거를 돌아보는 데 그치지 않고 미래를 향한 경종을 울린다.

‘최고의 부는 어디서 오는가’는 시대별 슈퍼리치의 권력, 정당성, 책임을 분석하며 묻는다. “현대 부자들은 과연 존재할 자격이 있는가?” 사회가 더 이상 기여하지 않는 부자들에게 지배당할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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