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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뜨개질

등록일 2025-03-30 18:09 게재일 2025-03-31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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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숙 시조시인
전영숙 시조시인

홈쇼핑에서 니트 카디건 광고가 한창이다. 쫀쫀하고 촘촘하게 짠 니트는 화려한 원색이다. 호스트의 쨍하는 소리가 눈을 끌어 모은다. 실 값이나 나올까 싶은 가격이어서 마음이 살짝 동한다.

가을이 시작되면 엄마는 늘 뜨개질을 시작했다. 어릴 적 우리 삼남매의 겨울옷 준비였다. 엄지와 검지에 실을 감고 대바늘을 움직여 코를 만들었다. 부지런히 손을 놀리면 어느덧 마름모가 만들어지고 꽈배기 무늬도 옷에 도드라졌다. 신기했다. 완성된 옷에는 가끔 목둘레에 방울을 만들어 달아주기도 했다.

공들여 짠 옷은 2년 이상 입기는 힘들었다. 키가 크면서 옷이 작아지기 때문이었다. 작아진 옷은 동생이 입다가 또 물림이 되어 막내 동생에게 갔다. 막내도 입지 못하게 되면 옷을 몽땅 풀어냈다. 중간에 실이 끊어질까봐 백열등 아래에서 조심스레 풀던 모습이 떠오른다. 풀어낸 털실들을 섞어 새로 짠 옷은 때로 오묘한 색을 지니게 되었다.

아무리 모양을 만들어 니트를 짠다고 해도 전문가가 아닌 엄마의 옷 모양은 단조로웠다. 소매는 고무뜨기로 조이고, 몸통은 일자에 목둘레는 거의 둥근 모양이었으니까. 내복을 입어도 털실은 몸으로 파고들어 가끔은 가렵고 따갑기도 했다. 두툼하고 투박한 그 옷보다는 알록달록한 기성복 입던 친구들이 부럽기도 했다.

굳이 고생하며 뜨개질한 옷을 입히려는 엄마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털실을 살 돈에 돈을 조금 보태 예쁜 옷을 사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시중에 파는 알록달록한 옷들이 내 눈에는 훨씬 더 좋게만 보였으니까. 툴툴거림은 입 안에서만 맴돌았다.

그 후로 손자들이 태어나서도 엄마의 뜨개질은 계속 되었다. 아이들이 조금 커 할머니가 짜 준 목도리와 조끼를 입지 못하게 되었을 때 나는 가차없이 그 옷들을 처분하였다.

내가 엄마처럼 대바늘을 들고 무엇인가를 떠 본 것은 아들들이 직장으로 학업으로 내 곁을 떠난 후였다. 늘 곁에 있을 줄 알았던 아이들이 떠난 빈자리는 꽤 컸다. 삶은 허전했고 그 허전함은 마음속에 깊은 우물을 만들고 있었다. 무엇인가를 해서 아이들에게 주고 싶었다.

그 때 문득 떠오른 것이 뜨개질이었다. 엄마처럼 잘 할 자신이 없어서 목도리를 떠 주기로 했다. 마음을 먹고 털실을 구입해 열심히 짜, 곧 아이들에게 보낼 수 있었다. 그 해 겨울은 다른 해에 비해 추웠다. 큰 아들은 외출할 때 목도리를 두른 인증샷을 보내왔다. 그러나 그 뒤로 사용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기성품이 더 가볍고 따뜻했으며 모양도 더 예뻤기 때문이리라. 몇 년이 지나고 그 목도리들은 어느덧 내게로 다시 돌아왔다. 섭섭했다. 몇 번을 버릴까 하다가 지금은 상자 안에서 조용히 잠자고 있다.

얼마 전 엄마는 가지고 있던 대바늘을 어떻게 해야 하냐며 혼잣말을 하셨다. 구순의 엄마가 뜨개질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까. 너 가져갈래 하셨다. 이미 나도 눈이 나빠져 더 이상 뜨개질은 무리였고 내게도 꽤 여러 개가 있었지만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값이 나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버리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아 대바늘과 몇 개의 털실 뭉치를 받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값이 별로 나가지 않는 바늘을 버리지 못하는 엄마의 마음을 생각했다. 별로 예쁘지 않은 목도리를 버리지 못하고 갖고 있는 내 마음과 함께.

내가 목도리를 뜬 것은 나의 헛헛함을 채우기 위한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면 엄마의 뜨개질은 자식에 대한 애정과 생존에 대한 갈망이 아니었을까. 고비고비 다가오는 삶의 어려움 앞에서 굴복하고 싶지 않은 엄마의 의지가 대바늘을 잡게 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아진 옷을 버리지 못하고 올올이 풀고 다시 뜨는 그 속엔 어떻게 해서든 살아내야 한다는 엄마의 절박함이 숨어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왜 이제야 알게 되었을까. 서툰 솜씨로 짠 목도리는 버리지 못하고 가지고 있으면서 엄마가 짜 주었던 손뜨개 옷 어느 하나도 가지고 있지 못함이 부끄럽고 안타까웠다. 그리고 엄마에게 너무 미안했다.

가져온 대바늘과 털실은 갖고 있던 대바늘과 함께 장롱 깊숙한 곳에서 쉬고 있다. 엄마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고여 있는 채로. 여전히 TV에서는 니트를 선전하는 호스트의 목소리가 뜨겁다.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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