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기 너머로 친구의 목소리가 쏟아진다. 나는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는데 그의 이야기 속에 갇혀 숨 쉴 틈이 없다. 궁금하지도 않은 자신의 주변 이야기들을 쓰나미처럼 쏟아내 나를 덮는다. 내 속은 점점 깊이 잠겨 버린다.
위로받고 싶은 마음에 내가 먼저 건 전화였다. 내 마음을 기대고 싶었다. 하지만 이 대화는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다. 내 안부를 묻는 가벼운 질문조차 없이 친구는 자신의 이야기만을 토해냈다. 자신의 아이들 일상을 풀면서 정작 내 아이들의 일상은 묻지 않았다. 마치 이 세상에 자신의 문제만 존재하는 듯 쉴 새 없이 넘나드는 거친 파도처럼 쉼이 없었다. 나는 한동안 침묵했다.
그리고 천천히 숨을 참았다. 물속에 가라앉은 것처럼 나는 듣는 사람으로 남았다. 익숙한 일이다. 타인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적절한 순간에 맞장구를 치고, 간혹 짧은 감탄사를 얹으며 존재감을 유지하는 일, 감정을 삼키고 하고 싶은 말도 접어두는 일, 그 소실점에서 묘하게 차분한 순간이 찾아왔다.
마치 깊은 물속에 잠긴 것처럼. 말할 수 없는 심연 속에서 조용히 견디는 느낌이다. 숨을 참고 버티며 내 차례가 오길 기다렸다. 끝내 내 차례는 오지 않았다. 잠깐 내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다시 자신의 이야기로 전환된다. 친구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한결 가벼워진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
끊어진 전화기 너머로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쉰다. 마치 해녀가 물 밖으로 올라오며 내뱉는 숨비소리처럼, 참아낸 숨이 길수록, 내쉬는 숨은 더 깊고 진하다. 숨비소리는 해녀들이 물속에서 숨을 참고 작업한 뒤, 물 밖으로 나올 때 내뱉는 숨소리다. 깊은 바다에서 오랜 시간 머무르려면 숨을 최대한 참아야 하고, 마침내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강하게 내쉬는 숨이 바로 숨비소리다. 그것은 단순한 호흡이 아니라 생존과 인내의 증거이며 다시 바닷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 과정이다.
나는 지금 물속을 헤엄치고 있는 중이다. 깊이 잠길수록 주변은 조용해지고 오직 나의 심장 소리만 또렷하게 들린다. 숨을 참고 견디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온몸이 묵직해지지만 나는 아직 떠오르지 않는다.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물 속에 오래 머물려면 급하게 숨을 쉬고 싶어도 참아야 한다. 그 순간을 견디지 못하면 방향을 잃고 허우적거리게 된다.
살면서 숨을 참아야 하는 순간들이 많았다. 아이가 원하는 대학을 가지 못했을 때 좌절하지 않도록 감정을 숨기고 숨을 죽이며 아이의 마음을 감쌌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는 자신만의 길을 찾았고 대학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개척해 주었을 때 나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숨을 참았던 그 시간이 나와 아이를 더 강하게 만들어준 시간임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때로는 하고 싶은 말을 꾹 삼켜야 할 때, 당장 도망치고 싶지만 버텨야 할 때, 조급한 마음을 누르고 기다려야 할 때, 숨을 참는 일은 힘들다. 하지만 그 순간을 이겨낼 때 비로소 물 위로 나와 크게 숨을 내쉴 수 있다. 해녀들이 힘겹게 숨을 내쉬며 다시 바다로 향하듯, 나 역시 삶에서 숨을 참고 견디는 과정을 반복하며 바닷속 보물들을 캐 나가는 것이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의외로 물속은 신비롭다. 빛이 닿지 않는 깊은 곳일수록 고요하지만, 그곳에서만 볼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다. 나는 잠시 그곳에 머문다. 물속에서 나의 감정들은 천천히 가라앉는다. 초조하고 불안하고 조급했던 흐린 감정들이 잠잠해지고 내 수면 깊숙이 덮여있던 언어의 조각들을 꺼내어 가만히 듣는다.
오래 참을수록 숨을 내쉴 때의 해방감은 더 크다. 친구가 다 들어주지 않더라도 견디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수면 위의 공기는 더욱 달고 청량하다. 다시 숨을 들이마신다. 그리고 물속으로 몸을 던진다. 숨을 참고 견디고 다시 떠오르기 위해.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