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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풍경

등록일 2025-02-17 19:38 게재일 2025-02-18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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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민문학연구자
허민문학연구자

동네 카페에서 주문한 테이크아웃 커피를 기다리는데, 근처를 지나가던 초등학생들의 대화가 들렸다. “야, 너희 계속 내 말 안 들으면 계엄 선포한다!”, “그래 맘대로 해봐라, 바로 탄핵할 테니까.” 내가 저 또래였을 때, ‘계엄’이나 ‘탄핵’이라는 단어를 알았는지 모르겠다. 아니 ‘선포’라는 말도 몰랐을 거다. 이렇게 빨리 알아야 될 말들인가 싶어서 괜히 조금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세상의 변화는 일상의 언어로부터 감지되기 마련이다. 어른들도 마찬가지 아니던가. 요즘처럼 법률용어가 친숙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인용’과 ‘기각’, ‘가처분’과 ‘적부심’, ‘공소장’과 ‘증인심문’, ‘평의’와 ‘변론 기일’, ‘피청구인’과 ‘방어권’ 등등, 전에는 알지도 못할 낱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쓰고 있다. 이제 대다수의 사람들이 ‘형사재판’과 ‘헌법재판’의 차이 정도는 마치 상식처럼 알고 있을 거다. 세상이 법의 언어와 사고에 지배되고 있는 형국인데, 이건 모두에게 긍정적인 현상은 아닐 거다. 법이 잊힌 상태가 가장 평화로운 법이기 때문이다.

지난주 학술대회 때 일이다. 발표를 맡은 선생들 다수가 ‘내란성 우울증’으로 글에 집중하기 어려웠다고 토로했다. 나도 각종 ‘내란성 질환’으로 혼란을 겪고 있던 터였다. 아마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1차 체포영장 집행이 무산된 직후부터였을 거다. ‘2차 체포영장은 언제쯤 발부될지’, ‘이번에 발부된 영장은 대체 어떻게 집행할지’ 등, 틈만 나면 핸드폰으로 속보를 확인했던 것 같다. ‘내란성 불면증’으로 잠을 뒤척이다가도 체포 여부부터 확인했으니, 피로하지 않은 온전한 하루를 갖기가 어려웠다. 요즘은 탄핵 심판 중계로 ‘내란성 위염’이 다시 도졌다고들 했다. “계엄령이 아니라 계몽령이다”, “의원이 아니라 요원을 빼내라는 거였다”, “계엄의 형식을 갖춘 경고였다”, “탄핵공작이다” …. 언제까지 이런 궤변과 망언이 실시간으로 중계돼야 하는 걸까? “내란성” 신종 질환의 발견은 ‘비상계엄’이라는 사회적 트라우마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단순히 지시하기 위한 언어유희가 아니다. 오히려 시대의 상처를 익살스럽게 상대화함으로써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공동의 방어 전략으로 봐야 한다. “내란성○○”을 함께 앓으며 서로를 위무하고 버티는 거다.

버스가 끊겨 택시를 타던 날 기사님이 말을 걸었다. “오늘 손님이 다섯 번째네요. 찾는 사람이 없으니 알아서 셈이 됩니다. 제가 원래 말이 없는 사람인데, 요즘은 누가 타든 하소연하게 되네요.” 그렇게 말이 없다던 기사님은 내가 내릴 때까지 말을 했다. 손님이 없을수록 말을 할 기회가 없을 테니까 이해할 수 있었다. 택시 운전 20년 만에 이런 불황은 없었다는 호소를 듣다 보니 언제부턴가 한산해진 지하철의 광고판이 생각나기도 했다. 차에서 내리기 직전 마지막으로 들은 발언은 이러했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상관없으니 제발 탄핵 국면만 지나가길”

이게 요즘 풍경이다. 지난 일주일간 겪은 일을 적은 것만 해도 이렇다. 윤석열 대통령은 탄핵 심판 중 “아무일도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체포가 없었다고 아무 일도 없었던 건 아니다. 12·3 비상계엄은 아이들의 말과 우리들의 마음을 오염시켰다. 작지만 이미 커다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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