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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 대표 실물 경제통… 국가와 고향 포항발전 초석 다지다

박형남기자
등록일 2024-10-23 20:02 게재일 2024-10-24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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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태어나 李 전 대통령과 함께 고학… 평사원서 대기업 CEO로<br/>13대 총선서 정계 입문… 기업서 쌓은 능력으로 능수능란한 정치력 선봬
지난 2004년 4월 15일 실시된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포항남·울릉선거구에서 5선에 성공한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이 꽃다발을 목에 걸고 부인 최신자 씨와 기뻐하고 있다. /경북매일 DB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이 23일 오전 별세했다.

이 전 부의장은 공교롭게도 자신의 공적비제막식이 예정된 이날 유명을 달리했다. 국회부의장 이상득공적비건립추진위는 타계소식이 전해지자 이 전 부의장 공적서를 영전에 바치고 영면을 추모했다.

이 전 부의장은 이명박 전 대통령의 형으로, 영일군, 포항남ㆍ울릉 지역구에서 6선, 24년 동안 국회의원을 지냈다. 지금의 포항은 그 기간 동안에 사실상 기틀과 기반이 만들어졌다. 곳곳에 이 전 부의장의 손때가 묻어있는 것이다. 이 전 부의장의 정치 정점은 동생인 이명박 전 서울시장을 대통령으로 만든 부분이다. 정치권 일각에선 아직도 이 전 부의장이 없었다면 이명박 대통령 탄생도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들 하고 있다. 그만큼 그는 동생의 대통령 당선에 큰 역할을 해 냈다.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후엔 부침이 많았다. 불미스런 일로 두 번의 옥고를 치렀고 그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돼 한쪽 눈이 실명되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폐렴 증세 등 합병증이 도져 병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힘겹게 명을 이어 오다 이날 생을 마감했다.

1935년생인 이 전 부의장은 가난했던 유·청년기에 동생인 이 전 대통령과 함께 고학했고, 서울대 상대를 졸업한 뒤 미국 켐벨대학교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취득, 일찍부터 인재 반열에 이름을 올렸다. 사회생활은 1961년 코오롱 1기 신입 공채사원으로 입사, 시작했다. 근면과 성실을 인정받은 그는 승진가도를 달려 코오롱과 코오롱상사 대표이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평사원에서 최고경영자(CEO)에까지 올라 입지를 다진 그는 지난 1988년 13대 총선에서 민정당 후보로 경북 영일군에 출마하며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그 지역구에서 내리 6선에 성공했으며 국회 운영위원장, 당 정책위의장, 당 사무총장, 당 최고위원, 국회 부의장 등 당 안팎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한나라당 시절, 기업에서 쌓은 추진력과 조정능력을 바탕으로 능수능란한 정치력을 보여준 이력은 지금도 회자된다. 특히 그는 정치권에서는 대표적인 실물 경제통으로 통하기도 했다. 우리나라가 외환위기 여파로 신음하던 1999년에는 당 정책위의장으로 있으면서 세계적인 신용평가기관들을 두루 만나 한국의 경제기반을 잘 설명하며 국가 신용등급 조정에 남다른 기여를 했다.

2004년에는 고사 위기에 처한 한나라당을 되살려내는데 앞장섰다.

이런 이 전 부의장의 정치적 자산은 동생이 대통령 선거에 나왔을 때 빛을 발휘했다. 그는 이명박 전 대통령 당선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후견그룹 ‘6인회’ 멤버를 이끌며 동서남북을 넘나들었고, 결국 지난 2007년 대선에서 동생인 이명박 서울시장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로 만든데 이어 당선시켰다. 당시 이 전 대통령의 경선 상대기도 했던 박근혜 후보와의 가교 역할도 그가 맡아 매끄럽게 처리, 친박 진영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등 동생의 대통령 선거 전반에서 맹활약을 했다.

이 전 부의장은 동생이 대통령에 취임하고서부터 역설적이게도 정치적으로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동생이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야권으로부터 감시와 비판의 대상이 됐고 ‘만사형통(萬事兄通)’ ‘형님예산’ ‘영일대군’ ‘상왕’등의 시비에 걸려 곤욕을 치렀다. 결국 권력 사유화 논란으로 2009년 8월 정치 불개입을 선언하며 24년 국회 여정을 마감했다. 이후 남미와 아프리카 지역 등을 방문, 자원외교에 나서며 정치로부터는 한발 비켜나 있었으나 대선자금 정치권 소용돌이에서 휩싸이면서 결국 이명박 검찰 체제에서 구속의 칼날을 받아야 했다. 그는 이후 박근혜 대통령 검찰에서도 보좌관의 로비 금품수수의혹, MB정부 국정원 특활비 논란 등이 불거져 한차례 더 사법처리 되는 등의 고충을 겪었다.

이 전 부의장은 국가 경영에서도 이름 석자를 새겼지만 포항에서는 더욱 큰 족적을 남겼다. 그와 함께 발을 맞춘 포항시청 공무원들은 이 전 부의장 국회의원 재직 당시 가장 일하기 쉬웠고, 예산도 팍팍 내려왔다고 회고한다.

이명박 대통령 당시에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포항에 SOC(사회간접자본) 예산을 집중적으로 배정, 이 전 부의장의 위력을 실감하기도 했다. 실제 2009년 포항 예산은 9390억원으로 2008년에 비해 9.9% 성장했고, 이중 국비지원액이 4373억원으로 2008년 2774억원에 비해 크게 증가하며 포항의 성장엔진이 되어줬다.

2011년 예산 역시 포항·울릉 지역 예산이 1449억원 늘었고, 포항-울산 고속도로 건설 1000억원, 포항-삼척 철도 건설 700억원, 포항-울산 복선 전철화 520억원 등을 확보, 포항도약을 견인했다. /박형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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