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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앞둔 신라의 거대 불사 이끈 무열왕

홍성식 기자 · 이용선 기자
등록일 2024-10-22 18:16 게재일 2024-10-23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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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의 신성한 보고(寶庫) 선도산<br/>&lt;11&gt;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은 언제 만들어졌을까?
선도산 정상 부근에 서있는 마애여래삼존불.

먼저 아주 먼 나라 이야기 한 토막.

현재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로 불리는 탈레반이 통치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그곳 바미안주(州)에 돌로 만들어진 거대한 부처의 형상이 있었다. 이름하여 ‘바미안 석불’.

그 바위 불상이 어떤 연유로 만들어졌고, 누가 폭탄을 터뜨려 파괴했는지에 관한 이야기는 한 편의 영화나 드라마 같다.

불상을 포함한 바미안 석굴사원은 아프가니스탄 힌두쿠시 산맥의 암벽을 파서 만들어졌다. 절벽 양쪽 끝자락에 커다란 불상이 조각돼 있었다.

서쪽 불상은 높이 55m, 동쪽에 자리한 불상도 38m 높이로 크기부터가 사람들을 압도했다. 통상은 서쪽 불상이 대중적으로 더 인지도가 높았다.

각종 서적과 신문 기사에 의하면 바미안 불상은 아프가니스탄이 불교 문화권이었던 6세기에 만들어졌다.

그리스 조형미술에 영향 받은 간다라 양식의 불상은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에도 등장한다. 이는 유서 깊은 불교 유산이라는 의미.

그런데, 2001년 바로 이 바미안 석불이 먼지로 사라진다. 탈레반에 의해 폭파된 것이다.

1996년 아프가니스탄 일대를 통치하게 된 탈레반은 이슬람 교리를 이유로 ‘형상을 가진 우상의 숭배’를 일체 금지한다. 부처의 모습을 한 석상도 이 교조적 정책을 피해가지 못했다.

아프가니스탄 내 불교 유적지의 대부분이 로켓포에 의해 형체도 없이 파괴됐다. KBS를 포함한 한국의 방송사는 바미안 석불이 탈레반의 포격으로 부서지는 장면을 TV 화면으로 가감 없이 보여줬다.

비단 불교신자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류의 공동자산이라 할 유물이 역사 속으로 허망하게 사라지는 모습에 경악했다. 아직도 우리들 기억 속에 선명하다.

정상 가까이 큰 암벽에 높이 7m 아미타여래

왼쪽에 관음보살상·오른쪽에 대세지보살상

본존과 협시, 다른 석재로 조각한 점 '이례적'

무열왕 재위기인 654~661년 조성 무게 실려

◆서라벌 서악의 불상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은…

무열왕릉과 진흥왕릉 등 여러 기의 왕릉이 산재했고, 선도산 성모라는 신라의 태동을 알린 여신의 설화가 전하는 경주 선도산엔 신라가 불교왕국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는 유물이 우뚝 서 있다.

마애여래삼존불 혹은, 아미타삼존불입상 등으로 불리는 돌에 새긴 부처의 형상이다. 이와 관련된 문화재청의 요약된 설명을 읽어보자.

“선도산 정상 가까이의 큰 암벽에 높이 7m나 되는 거구의 아미타여래입상을 본존불로 하여, 왼쪽에 관음보살상을, 오른쪽에 대세지보살상을 조각한 7세기 중엽의 삼존불상(三尊佛像)이 서있다. 서방 극락세계를 다스린다는 의미를 지닌 아미타여래입상은 손상을 많이 입고 있는데, 머리는 완전히 없어졌고 얼굴도 눈이 있는 부분까지 파손되었다. 그러나 남아있는 뺨, 턱, 쫑긋한 입의 표현은 부처의 자비와 의지를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취재를 위해 3~4차례 찾아간 경주 서악 선도산 일대. 마애여래삼존불의 미학적 완성도는 아프가니스탄 바미안 석불을 뛰어넘는 것 같았다.

크기는 작지만 섬세함과 치밀한 바위 조각 기술은 신라 석공들의 빼어난 솜씨를 미루어 짐작하게 했다.

인터넷 공간을 떠도는 흑백사진 한 장도 눈길을 끌었다. 19세기 후반이나 20세기 초반에 촬영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속엔 아미타여래입상 앞에 선 남루한 차림의 사내가 보인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존재하는 사진 속 사내는 현실 바깥 피안(彼岸)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문화재청은 이 사진 속 석불들이 아름다운 이유를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아미타여래입상의 넓은 어깨로부터 내려오는 웅장한 체구는 신체의 굴곡을 표현하지 않고 있어 원통형으로 보이지만, 여기에는 범할 수 없는 힘과 위엄이 넘치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묵직해 보이며, 앞면에 U자형의 무늬만 성글게 표현하였다. 중생을 구제한다는 자비의 관음보살은 내면의 법열(法悅)이 미소로 스며나오는 우아한 기풍을 엿보게 하는데, 어느 것 하나 소홀하게 다룬 데 없는 맵시 있는 솜씨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본존불에 비해 신체는 섬세하며 몸의 굴곡도 비교적 잘 나타나 있다. 중생의 어리석음을 없애준다는 대세지보살은 얼굴과 손의 모양만 다를 뿐 모든 면에서 관음보살과 동일하다. 사각형의 얼굴에 눈을 바로 뜨고 있어서 남성적인 힘을 강하게 풍기고 있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마애여래삼존불 보살상.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마애여래삼존불 보살상.

◆마애여래삼존불이 가진 특징과 미학적 완성도

마애여래삼존불(아미타삼존불입상)은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로 이어지던 시기의 불상 조각으로 본존불은 높이 7m, 관음보살상은 높이 4.55m, 대세지보살은 높이 4.62m로 파악되고 있다.

크기와 규모에서는 앞서 언급한 바미안 석불에 밀리지만, 예술성 측면에선 결코 뒤지지 않는 이 불상은 특징이 적지 않다. 흥미로운 사실까지 섞여 있다.

아래는 명지대 미술사학과 최선아 교수의 논문 ‘신라 陵墓(능묘)와 추선 佛事(불사): 서악동 고분군과 선도산 아미타삼존불입상’의 한 대목이다.

“선도산 아미타삼존불입상(마애여래삼존불)은 여러 면에서 이례적이며 특별한 존상이다. 우선 본존과 협시(夾侍·좌우의 보살상)를 안산암과 화강암이라는 서로 다른 석재로 조각했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기존 연구에서도 주목했듯 이처럼 別石(별석·각기 다른 돌)으로 삼존을 구성한 것은 거의 유례가 없다. 더욱이 본존을 이루는 안산암은 경도가 높아 가공하기 어려우며, 상의 현재 상태에서도 확인되듯 쉽게 균열이 생겨 불상 제작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석재다.”

본존불만이 아니다. 옆에 선 보살상은 재료가 된 석재가 인근에서 발견되지 않기에 ‘대체 어디에서 돌을 가져왔으며, 어떤 방법으로 산 정상부까지 무거운 석재를 옮겼을까’라는 의문을 부른다. 이에 관해 위의 논문은 이런 부연을 덧붙이고 있다.

“보살상을 이루는 화강암은 한반도에서 석불을 제작한 이래 꾸준히 사용한 석재로, 신라에서도 선도산 아미타삼존불의 제작 이전부터 화강암으로 불상을 만들었다. 하지만 안산암으로 이루어진 선도산 일대에서는 화강암이 전혀 산출되지 않기 때문에 두 보살상은 다른 곳에서 채석해 온 돌로 만든 것이다. 해발 약 390m에 달하는 선도산 정상까지 화강암 석재를 옮겨와 높이 4.5m에 달하는 보살상 두 구를 만들었다는 것은 상의 제작에 상당한 노동력과 기술이 수반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이 현존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Chat GPT가 묘사한 그림.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이 현존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Chat GPT가 묘사한 그림.

◆마애여래삼존불, 누가 무슨 이유로 세운 것인지…

그렇다면 이 세 불상은 언제, 누가, 무슨 이유로 만든 것일까?

이 의문에 ‘나무위키’는 “마애삼존불상은 양식적인 면에서 볼 때 통일신라 초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전체적인 형태는 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국보 제109호)의 본존,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국보 제201호)의 본존과 매우 흡사하다”고 간략하게 답한다.

이보다 조금 더 구체적인 걸 알고 싶다면 ‘신라 陵墓(능묘)와 추선 佛事(불사): 서악동 고분군과 선도산 아미타삼존불입상’을 읽어보길 권한다.

이 논문은 7세기 전반과 650년 전후, 그리고 661~663년 등 그간 다양한 의견이 제시돼온 선도산 아미타삼존불의 제작 시기를 능묘의 조영과 관련하여 쓴 글이다. 논문의 국문초록(國文抄錄)을 아래 인용한다.

“불상의 지리적, 역사적 맥락을 고려해 산의 정상에 6m가 넘는 대불을 조성할 당위성이 가장 높은 시기로 김춘추가 왕위에 오른 시기, 즉 무열왕 재위기(654~661)를 제시했다. 여기에는 선도산이 6세기 전반 법흥왕 이래 신라 중고기 왕의 능역으로 사용되었지만, 7세기 전반에는 왕릉의 입지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 그러나 654년 김춘추의 즉위 이후 다시금 왕의 능역으로 선택되었다는 점이 주요한 근거가 되었다. 이와 더불어 생전에 수릉을 축조하는 관례와 문흥대왕으로 추존된 김용춘의 묘를 이장했을 가능성을 고려해 선도산을 다시 능역으로 선택한 것을 무열왕대로 추정했으며, 산의 정상에 그 아래 왕릉들을 조망하는 방향으로 대형의 아미타상을 세운 것 역시 같은 시기일 것으로 보았다…(후략)”

만약 이런 추정에 힘이 실린다면 무열왕 김춘추는 삼국통일의 주춧돌을 놓은 동시에 통일을 앞둔 신라의 거대 불사를 이끈 왕으로 다시 한 번 이름을 높이는 셈이다. (계속)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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