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숙련기술인을 만나다 ⑧ 서광일 포항제철소 압연설비부 명장
“나를 움직이게 하는 가치관은 단 한 글자, 바로 ‘참’입니다.”
반드시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해야 비로서 문제가 온전히 해결된다.
만약 설비의 아주 작은 문제점을 적당히 넘기면, 그 문제점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결국 더 큰 설비 장애를 일으키게 된다.
곧바로 원인을 제거하기 힘들다면, 쉬운 문제부터 차근차근 해결해 나가면 된다. 그러다 어느새 문제의 근본 원인을 제거할 수 있게 된다.
현장에서 지키도록 약속된 모든 것이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원칙은 당장 지키기에는 귀찮고 비효율적인 요소처럼 보일 수 있지만, 나중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의 원인을 따져보면 십중팔구 원칙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포항제철소 압연설비부 서광일(60·사진) 명장에게 우직한 소처럼 한 발 한 발 내디뎌서 멀리 나아가는 ‘우보만리(牛步萬里)의 정신’을 최근 들어봤다.
42년간 포스코 압연설비 근무… 차근차근 근본 원인부터 찾아 해결하는 습관 일상화
포항제철소 혁신적 0.05㎜ 박판 압연기술 도전 성공, 日 등 철강선진국에 우수성 알려
진정한 나를 위해 끊임없이 ‘참’ 추구… 광양 전기강판설비·후배들 기술교육에도 앞장
- 포스코에 입사하게 된 계기는.
△포항시 북구 송라면 조사리 한적한 바닷가 마을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넉넉지 못한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나 개인의 꿈보다는 가족을 위해 서둘러 생활 전선으로 뛰어 들어가야 했다. 어업에 종사하던 아버지는 원인 모를 병으로 고생하고 계셨고, ‘실질적 가장’이라는 책임감으로 일찌감치 대학의 꿈은 포기했다. 부모님께서는 대학에 가길 원하셨지만, 어려운 집안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나는 빨리 돈을 많이 벌어 아버지를 큰 병원에 모시고 가고 싶었다. 포철공고 모집 공고를 봤고 담임 교사의 추천을 받아 지원하게 됐다. 당시 포철공고 입학 요강에는 전원 학비 지원 및 숙식제공, 졸업 후에는 포항제철소에 취업할 수 있는 기회도 주었다. 이러한 조건에 반해 부모님 몰래 원서를 내어 합격했고, 이 계기가 포스코와 운명적인 만남이 성사된 순간이다.
- 포스코 포항제철소에서 맡고 있는 업무는.
△1982년 4월에 입사해 압연설비부에서 근무하고 있다. 현재 압연설비 1, 2부의 설비 강건화 작업과 함께 설비의 고질적 문제점 해결 및 설비 장애 원인분석 후 개선방안을 도출하는 업무에 매진하고 있다.
또한 광양제철소 전기강판 설비 안정화 작업에도 참여하고 있으며, 후배 사원들의 기술력 향상을 위해 현장 중심 교육에도 주력하고 있다.
- 압연설비 업무를 42년 간 했다.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2001년 10월, 포스코의 1냉연공장에서는 DRM(Double Reversing Mill)라인 신설을 위한 TF팀이 발족됐다. 팀원들과 함께 설비 설계에서부터 설치 공사까지 순조롭게 진행됐으나, 시운전 단계에서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혔다. 가장 얇은 박판인 0.05㎜ 압연이 설계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TFT 구성원들은 일주일 동안 밤을 지새우며 데이터를 분석하고 해결책을 모색했지만, 쉽게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그러나 일본 메이커의 설계 사상을 참고해 롤 갭(Roll Gap)을 활용한 압하 압연과 철판을 당겨 두께를 얇게 만드는 연신 압연 방식을 결합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이 아이디어를 즉시 설비 프로그램에 반영한 결과, 성공적인 압연이 이뤄졌다. 이를 통해 포스코의 우수한 압연 기술력을 일본 등 철강 선진국에 알릴 수 있었고, 스스로에게도 큰 자신감을 주는 기회가 됐다.
- 안전한 현장 만들기를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는.
△‘원칙 준수’라고 생각한다. 내가 지켜야 할 원칙을 반복적으로 실천해 습관화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바늘허리에 실 매어 쓸 수 없듯, 원칙을 지키며 ‘업무 효율성’과 ‘안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다. 아울러 설비 강건화를 통해 불안전한 현장과 행동이 발생하지 않도록 사전에 예방해야 한다. 내가 조금 더 발로 뛰면 동료들이 더욱 안전하고 편의를 제공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노력하고 있다.
- ‘명장의 비결’은.
△정비도 조업의 일원으로 운전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정비에만 신경 쓴다면 현상 유지는 가능하지만, 제품 고급화 및 다양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운전의 원리를 이해해야 한다. 근본적인 기초 지식을 쌓아야한 응용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전기정비로 입사했지만 기계 설비도 함께 익혔다. 더 나아가 전기와 기계의 유기적 결함으로 탄생한 압연 조업을 알기 위해 압연 운전실 동료들에게 궁금한 점들을 물었다. 또한, 실시간 형상 모니터를 꼼꼼히 보면서 ‘왜?’라는 질문을 반복하며 압연 조업을 익혔다. 이런 노력이 있었기에 다양한 업무를 두루 맡을 수 있었고, 나름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 특별한 인생 철학이나 업무 원칙이 있다면.
△문제를 지혜롭게 다루기 위해서는 동료들과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이 운전과 정비, 기계와 전기의 총체적인 움직임 가운데 일어나는 만큼 동료들과의 적극적인 소통과 협업이 절실하다. 나는 ‘무엇 때문이 아닌 무엇 덕분에’라는 마음가짐을 항상 실천하려 했다. 동료들과의 협력과 소통이 나를 스스로 성장하게 하는 지름길이었다. 동료들을 통해 모르는 분야의 지식과 정보를 쉽고 빠르게 습득하고, 자신의 업무에 적용할 수 있었다. 함께 일하고 있는 동료들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최고의 공로자다. 힘든 일이 발생할 때마다 항상 앞장서서 도와주고 힘을 보태준 동료들이 있었기에 나 자신도 있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늘 참되게 살아라, 모임에 불려 나가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해 주시곤 했다. 그래서 나는 ‘참’을 끊임없이 추구한다. 일할 때도, 친구들을 만날 때도, 심지어 놀 때도 진짜 나를 보여준다. 이런 면모는 호감을 이끌어 내고, 이 호감은 다시 나를 참으로 이끄는 힘으로 작용한다. 나의 주변에 사람이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반면에 내가 일에 있어서 가장 싫어하는 것은 ‘적당히’, ‘대충대충’이다. 일을 적당히 처리하고 넘어가면 나중에 그 대가가 두세 배의 고통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설비를 알고자 일본어 공부를 하고, 그것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됐다고.
△1냉연공장 합리화 TFT에서 일할 때, 우리는 모든 면에서 일본보다 미숙했다. 우리가 현장에서 우왕좌왕하는 동안, 일본 기술자들은 자기 분야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배울 점이 많았지만, 언어의 장벽에 가로막혔다. 이를 타파하기 위해 일본어를 배울 수밖에 없었고, 그때부터 속성으로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다. 누가 보면 미쳤다고 할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한 나를 보고 당시 월세방 주인이 성실한 청년으로 판단해 자신의 조카를 소개해 주었다. 그 조카가 지금 나의 아내가 됐으니, 공부가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힌남노 시 제철소에 근무한 직원이라면 모두가 그 순간을 가장 기억에 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인근 냉천이 범람하면서 포항제철소는 악몽 같은 상황을 맞았다. 정말 앞이 캄캄했다. 솔직히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 생각이 안 났었다.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고 복구 대책을 고민하던 중, 일본의 쓰나미 피해가 떠올랐다. 오랫동안 인연을 이어오던 일본 기술자들에게 문의하면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시간과의 싸움에서 중요한 결단을 내려야 했을 때였다. 설비 제작 메이커에서 전부 교체를 주장했을 때,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고 나름의 방안을 세워 복구하기로 결정했다. ‘과연 올바른 결정일까’라는 고민이 가장 어려웠다. 현장을 신뢰하는 경영진의 끊임없는 소통과 지원이 없었으면 가능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할 수 있다’가 아니라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던 것 같다.
- 포스코의 미래를 위해 가장 중요한 과제는.
△구성원 각자가 기술력을 조금 더 높여 기초 체력을 키우면, 제철소는 항상 최고의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구 때문에’가 아닌 ‘누구 덕분에’라는 조직 문화를 만들어 모두가 합심하여 노력하면, 더 행복하고 더 가치 있는 일터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후배들뿐만 아니라 모든 직원이 자기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노력을 했으면 한다. 나 자신도 지금까지 하루에 무엇인가를 한 개씩이라도 배우려 하고 있다. 일은 열심히 하는 것보다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 공부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잘할 수 없다. 지식을 쌓아 놓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잘 대처할 수 있다. 내 경험으로 보면, 배움은 일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소중하다.
서광일 포항제철소 압연설비부 명장은
△포항제철공업고등학교 졸업(1982년)
△올해의 정비명인(2011년) 포스코 명장(2017년)
△포스코 기술대상(2021년)
△24회 철의 날 장관표창(2023년)
△포스코 상무보 신규 선임(2024년)
/이부용기자 lby1231@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