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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져봐야 알지” 독일여행기(中)

등록일 2024-06-26 18:24 게재일 2024-06-27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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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외사촌이 사는 튀빙겐에 거처를 정해두고 인근 도시를 다니면서 늘 기차를 탔다. 낮의 기찻길 차창 밖은 전형적인 독일 시골 풍경이었다. 멀리 비스듬하게 야트막한 언덕은 모두 포도밭이라고 동생이 얘기해 주었다. 가까운 둔덕도 온통 푸르렀다. 남편이 저기 있는 건 무엇이냐고 물었고 동생은 들판, 초원, 평원이라고 대답했다. 남편의 물음은 거기 푸른 들판에 심은 작물을 묻는 것이었고, 동생은 잘 모른다고 말했다. 남편의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은 채 며칠이 지났다. 슈트트가르트에서 튀빙겐으로 오는 길이었다. 셋이 서로 마주앉아 한창 수다를 떨고 있었다. 어느 역에선가 웬 남성이 양해를 구하더니 남편 옆 빈자리에 앉았다. 여전히 한국어로 얘기하고 있는 우리에게 그가 어디서 왔느냐며 불쑥 영어로 말을 걸었다. 한국이라고 하자 그럴 줄 알았단다. 놀라는 우리에게 남편의 휴대폰을 슬쩍 봤더니 한글이 보여서였다며 웃었다.

이참에 남편은 궁금증을 해소하고 싶었던지 차창 밖의 푸른 들판을 가리키며 무엇이냐고 물었고, 동생이 유창한 독일어로 묻고 그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주먹 진 왼손의 새끼손가락부터 차례로 펼쳐가며 열심히 설명하고 동생은 들으면서 크게 웃었다. 아마도 몇 가지의 작물 후보를 꼽는가보다 생각하며 동생의 통역을 기다렸다. “밀인지, 보리인지, 귀리인지 모른다. 만져보면 알 수 있는데…. 잘 모르겠다.” 맞는 말이긴 하다. 가까이 가서 보거나 직접 만져봐 알 수 있다는 그의 대답은 지극히 정확했다. 우리는 그의 말에 크게 동의하면서도 그 말이 왠지 몹시도 우스웠다. 그렇게 얘기의 물꼬를 튼 김에 우리는 튀빙겐에 도착할 때까지 유쾌한 수다를 나눴다. 그와 헤어진 후에도 우리는 그의 대답을 곱씹고 흉내내며 웃고 또 웃었다.

며칠 후 비오는 저녁이었다. 동생이 평소 자주 가는 산책길 옆에 저런 밭이 있다며 가서 직접 만져보자고 했다. 엄청나게 크게 펼쳐져 있는 밭엔 생김새가 비슷하지만 두 가지 작물이 있었다. 가까이 가서 만져 봐도 별무소득이었다. 농촌에 산 적이 없는 우리였다. 네이버 렌즈로 사진을 찍어 검색했더니 보리라고 했다. 그 옆 밭도 보리란다. 아직도 정확한 답을 못 찾은 우리는, 만져봐도 모르겠다며 깔깔댔다. 마침 거대한 트랙터를 몰고 오는 농부가 있었다. 동생은 손짓으로 차를 세웠다. 트랙터의 굉음까지 멈추고 얘기를 나누는 동생을 지켜보면서 나는 궁금증에 조바심이 났다. 그와 헤어진 후 동생은 나를 밭 가까이 데려갔다. 이건 밀이고 저건 보리래. 그런데 왜 웃었느냐는 내 물음에 동생은 대답했다. “밀은 빵을 만드는 거고, 보리는 맥주를 만드는 거래. 저기 보리밭은 자기 건데, 맥주를 만드는 게 아니고, 소를 먹이는 거래. 그렇다고 소가 취하지는 않는대. 아마도 우리가 밀과 보리를 구분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나 봐.” 드디어 농부를 만나 우리의 의문을 풀었고, 남편에게 밀과 보리라는 명쾌한 답을 전했다. 독일에서 만난 두 명의 남성은 독일인답게 진지해서 유쾌했다.

그 후 여행 내내 셋 중 누군가가 무엇에 대해 물으면 먼저 이렇게 대답했다. “만져봐야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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