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를 켤 때마다 바탕화면에 등장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근경에 초록색으로 빛나는 텐트가 자리하고, 멀지 않은 곳에 침엽수 한 그루 삐죽이 솟아 있다. 날카로운 선(線)으로 무장한 산맥이 흐르고, 원경에는 한결 부드러워진 산이 붉은색 아래 침묵한다. 하늘에는 우유를 쏟아부은 것처럼 별들이 무리 지어 하얗게 빛난다. 은하수가 고요를 지배한다.
게오르크 루카치(1885∼1971)가 ‘소설의 이론’(1916)에서 묘사한 고대의 나그네 행장을 밝히는 그 은하수일 것이다. “별이 총총한 하늘이 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인 시대,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주는 시대는 복되도다”로 시작하는 ‘소설의 이론’ 첫 번째 문장은 압권이다. 고대의 나그네는 외롭지도 두렵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초록색 텐트 안에 누가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가 단수인지 복수인지, 복수라면 몇인지, 단수라면 성별은 어찌 되는지 알 수 없다. 더욱이 그나 그녀 혹은 그들의 행선지(行先地)에 관한 정보도 전연 없다. 그도 그럴 것이 텐트 안에는 불빛이 환하지만, 사람의 그림자는 흔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등장인물에 관한 궁금증은 커져만 간다.
21세기 현재의 차고 넘치는 인위적인 조명 하나 존재하지 않는 태곳적의 어둠을 밝히는 저녁놀과 일찍 떠올라 지상을 비추는 별들의 무리. 일몰로 검게 어두워진 근경의 사위와 여전히 붉은색을 유지하는 원경의 서녘 하늘이 대조를 이루는 가운데 쏟아져 내리는 것처럼 하늘을 하얗게 뒤덮고 있는 수많은 별의 군집 아래 홀로 빛나는 초록색 텐트!
나그네는 거기서 어떤 상념에 젖어 있을까. 지나온 길을 반추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일이나 모레 그 어느 즐거운 날에” (윤동주 ‘참회록’에서 인용) 가야 할 길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만 24년 1개월을 살아온 청춘의 참회는 역시 낯설고 희유(稀有)한 것으로 다가온다. 그에게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가 원동력으로 작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바탕화면을 보는 나는 양가감정에 빠져든다. 나고 자란 시간대를 생각하면 분명 지나온 길을 돌아봐야 할 텐데, 실상 내다보는 사유에도 인색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래학자들이 말하는 ‘특이점’의 원년이 2045년으로 앞당겨져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면, 왕가위(王家衛)가 연출한 ‘2046’(2004)이 구현될 해가 20년 남짓 남았기 때문이리라.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고 박인환(1926∼1956)은 ‘목마와 숙녀’(1955)에서 쓴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인환을 이해할 수 없다. 어째서 그는 세월이 오고 간다고 썼을까?! 시간이 직선운동이 아니라 왕복 운동한다는 것일까?! 시간의 화살 대신 시계추의 진자운동을 세월로 치환한 까닭은 무엇인가?!
글을 쓰는 동안 사위가 어둡고 무거워지고 있다. 어둠은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천상으로 올라간다. 인간의 시간이 천상의 시간을 앞지르기 때문이다. 하늘보다 먼저 희망하고 하늘보다 먼저 절망하는 인간의 시간이 깊어가는 봄날 저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