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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명당 찾다 희생된 영혼 지키는 ‘무송’

등록일 2024-02-14 19:37 게재일 2024-02-15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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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문경 적성리 마총(馬塚)·노총(奴塚)·묘지기 무송(舞松) 노거수
커다란 바위 위에 뿌리 내린 무송 노거수의 수령은 400년쯤으로 추정된다.
커다란 바위 위에 뿌리 내린 무송 노거수의 수령은 400년쯤으로 추정된다.

말 무덤과 노비 무덤을 지키는 춤추는 무송 노거수는 문경시 동로면 적성리 965번지 황장산 자락의 도로변에 살아가고 있다. 소나무가 춤추는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하여 무송(舞松)이라 이름을 짓고 그곳을 무송대(舞松臺)라 하였다.

무송대 거대한 바위 위에 마총(馬塚·말 무덤)과 노총(奴塚·노비 무덤)이 무송(舞松·춤추는 소나무) 노거수가 삼각형으로 자리 잡고 있다. 말 무덤 앞에는 마총이라는 작은 비석과 노비 무덤 앞에는 노총이라는 작은 비석이 세워져 있어 무덤의 주인공을 알 수 있다,

소나무 노거수 앞에는 무송대(舞松臺)라는 작은 비석이 세워져 있다. 무덤의 영혼이 소나무로 화신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굵은 가장이에서 뻗어 나온 붉은 나뭇가지가 용수철같이 몇 번이나 굽혀진 모습에서 응집된 힘을 느낄 수 있다. 이곳 무송대는 풍수지리설 연주패옥(聯珠佩玉) 형세에 관련된 전설이 있다.

 

임진왜란때 귀화한 명군 부장 두사충

약포 정탁 대감의 도움으로 목숨 건져

은혜 갚으려 ‘연주패옥’ 묏자리 알렸지만

찾아가던 도중 말 발길질에 머슴 숨지자

끝내 찾지 못하고 무송대 바위 위에 무덤

마총·노총·무송 삼각형으로 자리 잡아

응집된 힘 느껴지는 영혼 서린 붉은 가지

바위 뚫고 뿌리내려 400년 수령 견뎌내

 

‘1592년 선조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을 따라 조선에 온 명군의 부장 두사충(杜思忠)은 당시 명성이 높은 풍수지리학자로서 조선에 귀화한 사람이다. 그가 조선의 팔대명당(八大明堂) 가운데 하나라고 전하는 연주패옥을 문경시 동로면 적성리에서 발견하였다고 한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벽제관(碧蹄館) 전투의 패전으로 문책을 당하게 되었으나 약포(藥圃) 정탁(鄭琢) 대감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게 되었는데, 은혜를 입은 대가로 연주패옥의 명당을 정탁 대감의 신후지지(身後之地·살아있을 때 미리 잡아둔 묏자리)를 이 일대에 잡아두고 묘지로 사용토록 그 위치를 정 대감의 심복인 말을 돌보는 머슴에게 가르쳐 놓았다. 그 후 정탁 대감은 천하의 명당 연주패옥을 자기 아들에게 찾아보도록 그 위치를 알고 있는 머슴과 함께 문경으로 내려보냈는데, 현 위치에 이르러 그 명당의 위치가 어디냐고 머슴에게 묻자, 타고온 말이 갑자기 뒷발질하여 머슴이 즉사하고 말았다. 천하의 명당을 잃게 된 아들은 화가 나서 말의 목을 베어 이곳에 묻고 머슴도 말의 무덤 옆에 묻어주었다.’

명당에 묻히려다 애마도 충복 노비도 모두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연에 가슴이 아렸다. 지금도 이 명당을 찾으려는 풍수가가 있다고 한다. 죽어서도 후손들에게 벼슬을 내려주고 싶은 조상의 마음이야 이해할 수 있다지만, 오늘날에까지 명당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니 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심지어 돌아가신 조상을 잘 모셔야 한다면서 설, 추석 명절에 제사 음식 준비와 집안 손님맞이로 맏며느리들이 심한 후유증을 겪는다고 한다. 이는 죽은 조상이 산 후손을 괴롭히는 것이다. 죽은 제갈량이 산 사마의를 물리친다는 삼국지 역사소설을 읽은 적은 있지만, 죽은 조상이 산 후손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일은 좀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 한 스님이 다비식에서 타들어 가는 장작더미 불꽃을 바라보면서 장례문화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인도에는 마지막 인생을 출가하여 살면서 천상에 태어나기 위해서 신의 강인 갠지스강에 목욕하러 간다고 했다. 그곳에서 죽으면 화장할 때 돈이 많고 적음에 따라 시체 태우는 장작 수가 결정되지만, 그렇다고 돈을 많이 벌려고 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외국 관광객은 잘못 알고 거지로 오인하기도 한다고 했다. 인연에 따라 살면서 장작 수가 적어 시체가 일부 타지 않고 남아있으면 강에 던져 물고기의 밥이 되어 사라진다고 했다.

어떤 나라는 조장(鳥葬)의 풍습이 있어 사람이 죽으면 칼질해 산에 갖다 놓는다고 했다. 그러면 독수리가 달려들어 10여 분 만에 사체 살점은 하나도 남김없이 다 먹기를 기다렸다가 남은 뼈는 수습하여 갈아서 주먹밥을 만들어 던져놓으면 독수리들이 받아 삼킨다고 했다. 남은 해골은 가져와 바가지로 사용한다고 했다.

어떤 지역에는 개장(犬葬)의 풍습이 있어 사람이 죽으면 사찰 주변에 시신을 던져놓으면 수십 마리의 개들이 달려들어 시체를 먹어 치운다고 했다. 외국 관광객이 개한테 물리어 항의하자 사찰 주변의 개들을 모두 사살한 사실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아직도 이런 풍습이 남아있다고 한다.

시신 훼손과 같은 장례는 죽은 사람을 모독하는 것이 아닌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실제로 남미 페루를 여행한 적이 있었다. 우르밤바에서 마추픽추로 가는 도중에 들린 마을에는 집 안 선반 위에 조상의 해골을 모셔놓은 것을 보았다. 나에게는 소름이 끼치는 장면이지만, 그들에게는 일상생활로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 밖에도 나라마다, 지역마다 다양한 장례문화가 있다고 했다. 장례문화가 다른 것은 기후의 영향과 비용 때문이라고 했다. 땅에 묻어도 시체가 썩지 아니하는 지역에는 매장은 곤란하다고 했다. 문화야 어떻든 간에 죽음에 대하여 애도하는 마음은 똑같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보면 장례문화를 가지고 선진국이니 미개국이니 구분하고 차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스님은 부도를 만들에 안장한다고 했다. 우리의 장례문화도 많이 변했다. 묘봉을 만드는 매장보다는 화장하여 유골을 납골당. 수목장 등에 모시거나 산천에 뿌리기도 한다. 조상들이 명당이라고 하여 모신 산소가 벌초할 때면 뱀이나 벌에 쏘여 후손이 다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궁금하다. 옳고 그름의 문제이기보다 장례문화의 변화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명당을 찾는다고 산의 나무를 베어내거나 땅을 훼손하는 일은 환경보호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무송 노거수는 수령 340년이라고 하나 연주패옥 명당 이야기를 보면 지금으로부터 432년 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으니, 나무의 나이는 400년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큰 바위 위에 뿌리를 내린 것으로 보아 다른 노거수보다 자람이 더디었다. 20여 년 전 노거수의 키 8m, 가슴 높이 둘레 2.5m, 수관 폭 14.5m가 지금도 그때의 크기와 별다르지 않았다. 말과 머슴의 무덤을 만든 후 소나무를 심었든지 아니면 그 후 황장산 소나무 솔씨가 바람에 날아와 자연 발아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주민들이 보호하여 온 것만으로도 민속 문화적 가치가 있는 소나무 노거수이다. 고도 359m, 위도 36.775994, 경도 128.289548 있는 무송 노거수 품격을 높여주면 어떨까.

명당으로 희생된 충성스러운 말과 머슴의 영혼을 지키는 춤추는 무송 노거수가 건강하게 오래도록 살아가기를 기원한다. 연주패옥의 명당 이야기를 보면서 명당은 형이하학적인 땅이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조상의 은덕과 삶을 추모하는 마음이 아닐까 생각했다.

 

 

연주패옥(聯珠佩玉) 형세란…

선녀인 옥녀가 화장하기 위하여 거울을 보며 목걸이를 벗어놓은 형세를 가진 곳에 산소를 쓰면 옥관자(玉貫子) 서 말, 금관자(金貫子) 서 말이 나온다는, 즉 벼슬한 사람이 많이 태어난다는 명당을 말한다. 옥관자(玉貫子)는 조선 시대 옥을 재료로 하여 망건의 당줄을 꿰게 만들어 달던 작은 고리. 금관자(金貫子)는 망건(網巾)에 부착된 금으로 된 작은 고리로, 당줄을 꿰어 걸어 넘기는 구실을 한다. 조선 시대 정2품, 종2품 관리가 사용하였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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