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흥무왕 김유신’에 얽힌 전설 같은 이야기들
7세기 신라엔 ‘삼한일통(삼국통일)을 이끈 스타급 인물’이 여러 명 출현한다. 백제를 멸망시켜 딸 고타소(古陁炤)과 사위 김품석의 원수를 갚은 동시에 통일의 초석을 닦은 무열왕 김춘추, 강력한 군사대국 고구려가 무릎을 꿇게 만들고, 지속적으로 내정을 간섭하던 당나라를 나라 바깥으로 내쫓은 문무왕 김법민, 통일왕조 권력의 중앙 집중화를 이뤄 문화·예술 발전의 토대를 마련한 신문왕 김정명 등.
3명의 왕 모두가 삼국통일의 험로에서 큰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삼한일통 과정에서 가장 주목받아 마땅한 단 한 명의 인물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이 던져진다면 아마도 대다수가 “김유신”이라 답할 게 분명하다.
김유신은 673년 여름에 죽는다. 당시 그의 나이 79세. 외과 수술과 항암 치료제가 없던 시절. 남성의 평균수명이 마흔 살이 되지 않던 고대였음을 감안하면 150세쯤 산 것과 다름없다.
김유신의 장례식은 성대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의 조카이기도 한 문무왕은 ‘김유신의 사망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하며, 비단 1천 필과 조 2천 석을 부조로 보내고 군악의 고취수(鼓吹手) 100명을 장례식에 보냈다. 김유신의 유해는 금산원(金山原)에 묻혔고, 왕의 명령으로 그의 공적을 기록한 비석이 무덤 앞에 세워졌으며 수묘인(守墓人)을 두어 무덤을 지키게 했다’고 한다.
673년 79세로 생을 마감, 1천350년째 ‘신라의 영웅’으로 불려
태종·문무왕 보필해 삼한일통 대업 이룬 최고의 신하로 평가
일부 역사학자 “무서운 정치가” 비판 있으나 빼어난 인물 분명
◆사후(死後) 1천350년째 끊임없이 이어지는 신라의 ‘영웅 전설’
김유신이 신라에서 지녔던 위상은 사후에도 크게 변하지 않는다. 사망한 지 162년의 시간이 흐른 835년. 김유신은 마침내 그 지위가 왕으로 격상된다. 단군조선에서 고려까지의 역사를 기술한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김유신은 835년 흥무왕(興武王)으로 추존(追尊·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 임금의 칭호를 주는 것)된다.”
비단 통일신라 시대만이 아니었다. 김유신의 삶과 죽음은 이후 또 다른 왕조인 고려와 조선에까지 문헌과 구전(口傳)을 통해 전해졌다.
까마득한 옛날인 1천350년 전 세상을 떠난 한 신라인의 이야기가 ‘영웅 전설’처럼 21세기인 지금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것이다.
국회도서관 자료조사관인 박찬흥의 논문 ‘김유신 관련 사료를 통해 본 시기별 인식’은 신라에선 김유신이 거의 ‘신격화’ 됐었다는 걸 알려주고 있다. 이런 대목이다.
“김유신은 살아 있을 때는 물론이고 죽은 뒤에도 신라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살아 있을 때는 태종과 문무왕을 보필하여 삼한일통의 대업을 이룩한 최고의 신하로 평가받았다. 당나라는 물론이고 고구려와 일본에서도 김유신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 평가했다. 김유신은 죽은 뒤에도 태종(김춘추)을 도와 대업을 이룬 ‘좋은 신하’ 또는 ‘성스런 신하’라고 인식됐다. 또, 문무왕과 함께 ‘두 명의 성인’으로 추앙되었으며, 불교적으로 33천(우주의 중심)의 한 사람이 내려온 것이 김유신이라고 인식됐다.”
◆고려는 ‘신령스런 장수’로, 조선은 ‘신라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
한 왕조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새로운 왕조가 등장하면, 이전 왕국의 영웅은 평가 절하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럼에도 김유신에 관한 평가는 고려와 조선에서도 결코 낮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높아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심지어 고려는 김유신을 신(神)의 자리에까지 가져다 놓는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 역시 김유신을 지목해 만고충신(萬古忠臣)이라 추켜세웠다.
앞서 언급한 논문 ‘김유신 관련 사료를 통해 본 시기별 인식’에서 이와 관련된 부분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고려 때 김유신은 신라에 이어 진천현 태령산의 사당에서 국가제사로 받들어졌다. 윤관은 김유신이 신령스러운 기적을 많이 일으킨 장군으로 인식했고, 이승휴는 김유신이 오묘한 병서를 얻어 무예에 뛰어났다고 말했다. 고려 말의 정추도 김유신이 기이한 능력을 가진 장수이고 큰 무공을 세웠다고 인식했다. 조선시기에서도 무열왕·문무왕과 신하 김유신의 절대적인 신임 관계로 인해 김유신이 큰 공적을 세웠다는 평가가 지속됐다. 그리고 김유신이 신라 왕조 전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 보았다. 김유신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무(武)를 대표하는 인물로 평가됐다. 그리고 성리학적 관점에서 이러한 김유신의 행적을 통해 그를 충신이라고 인식했다.”
고려와 조선왕조의 평가만이 아니다. 일연의 ‘삼국유사’와 김부식의 ‘삼국사기’ 등 고문헌에 등장하는 김유신의 청소년 시절 일화를 읽어보면, ‘이건 일반 인간에 대한 기록이 아닌 영웅 탄생 설화에 가깝구나’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한성대학교 한국고대사연구소 학술연구원 박승범의 논문 ‘김유신의 생애와 역사적 의의-그 가계(家系)와 활동을 중심으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서술된 이야기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김유신이 태어난 이후 청년기까지의 활동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전한다. ‘삼국사기-김유신 열전’에서는 15세에 화랑이 돼 그를 따르는 이른바 용화향도(龍華香徒)를 거느렸다는 것과 17세에 고구려·백제·말갈 등 외적을 평정해 삼국을 아우를 뜻을 품고 수도하다가 신선으로 여겨지는 난승(難勝)이라는 노인으로부터 비법을 받았다는 것, 그리고 이듬해인 612년 거듭된 적의 침입에 웅대한 뜻을 갖고 있던 중 보검이 영험을 얻었다는 것 등의 일을 전하고 있다. 이와 달리 ‘삼국유사’에서는 18세가 되던 해에 검술을 닦아 국선(國仙)이 되었는데, 이때부터 이미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정벌할 뜻을 갖고 있던 중 고구려 첩자의 꾐에 빠져 위기에 처했으나 신라 국가제사 중 대사에 해당되는 제장인 삼산(三山)의 신령들이 도움을 주어 위기를 벗어났다는 것을 기술하고 있다.”
◆비판하는 역사학자도 있으나, 빼어나고 돌올한 인물인 것은 분명해
이처럼 인간의 영역을 벗어나 누구도 흉내 내기 어려운 위업을 이룬 ‘신화적 존재’로 부각돼온 김유신이지만, 세상 모든 사람이 그를 우호적 시선으로 보지는 않는다. 사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가 좋아하는 인간’이란 세상에 없다.
단재 신채호(1880~1936)는 한국 ‘근현대 민족주의 사학’의 효시이자 거두라 할 수 있는 인물. 단재와 그의 견해를 따르는 역사학자들은 김유신을 매섭게 질타한다. 단재의 저서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는 김유신을 지목해 ‘교활한 음모로 적국을 혼란에 빠뜨린 음험하고 무서운 정치가’라고 비판한다. 이에 수긍하는 후학들도 적지 않다.
김유신에 관한 비판적 견해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고개가 갸우뚱한다. 앞서 인용한 박승범의 논문은 기자의 의문에 이런 답을 들려주고 있다.
“김유신 가문은 금관가야 왕족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될 영화를 잃어버리고 망국의 한을 품은 채 신라 사회에 편입되었다…(중략) 김유신 가문은 왕족으로서 누려야만 했던 지위와 영화를 신라의 유력한 가문이 되면서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김유신 가문은 정당한 전략은 물론이고 때로는 비열하다고 평가할 수 있는 모략을 구사하기도 했다. 이러한 김유신의 모습은 신채호가 ‘조선상고사’에서 ‘평생의 공적을 전장에서 세운 사람이 아니라, 음모로 이웃나라를 어지럽힌 인물’이라고 평가할 만큼 부정적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김유신과 그 가문이 살아남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과 의지의 산물이었다. 신라만이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에 정복당한 다른 고대국가들은 최상의 경우 그 국명만 남겼을 뿐 구성원들의 존재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따라서 김유신이 보여준 생존전략을 단순히 협잡, 또는 음험함만으로 평가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할 수 있다.”
길고 지루했던 여름이 끝나고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 지난 주말. 경주시 충효동을 찾았다. 봄에 이어 김유신의 묘를 다시 한 번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기나긴 세월 동안 숭배와 비난의 목소리를 모두 듣고 있지만, 걸출하고 돌올한 신라의 명장(名將)임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김유신.
화려하게 조성된 ‘삼국통일 주역’의 봉분은 높고 거대했고, 개국공 순충장열 흥무왕릉(開國公 純忠壯烈 興武王陵)이라 적힌 비석은 후손들의 자랑이 되기에 충분했다.
궁금하다. 김유신은 자신의 이름이 1천35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지금도 인구에 회자될 것을 스스로도 예견했을지. (계속)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