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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터너

등록일 2023-07-23 17:49 게재일 2023-07-24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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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터너. /네이버 제공

오랜만에 친구와 앉았다. 귀국 음악회에서 도와달라고 했다. 무대를 떠난 지 오래라서 감각이 무뎌진 상태인 내게 친구는 가볍게 대답했다.

“페이지터너야.”

악보를 넘겨주는 사람이 페이지터너(Pageturner)이다. 몸은 무대 위에 있지만 보이지 않는 존재로 설정된 투명인간이다. 하지만 연주와 관객을 잘 이어주는 레가토(legato)로 연주자에게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다. 친구의 요청으로 연습에 들어갔다. 상대의 결에 맞춰 호흡을 늘이고 줄여갔다. 구름 같은 청중 앞에서 연주했던 나인데, 까짓것 악보를 넘기는 일쯤이야, 그런데 막상 공연에 닥치자 마음과는 달리 심장이 두근거렸다. 작은 실수도 없도록 악보 밑을 예쁘게 접어 손가락에 잘 잡히게 했다. 친구가 박수를 받으며 무대로 나갔다. 조명이 친구만 비추는 사이 나는 단상에 악보를 올렸다. 친구의 손가락이 날래게 한 음절 찍었다. 리스트의 ‘파가니니 에튀드 6번’이었다. 손가락이 탄력 있게 움직이자 음표들이 허공에 튀어올랐다. 묵직하면서도 경쾌한 음이 세게 또는 여리게 흘러나왔다. 음표들이 춤을 춰도 나는 로봇처럼 발을 움직이지 않았다. 얌전히 일어났다 앉았다만 되풀이하며 악보만 넘겼다. 한 장 두 장 세 장…, 친구는 음표와 쉼표를 몸짓으로 표현했다. 손가락이 춤을 추는 사이둘은 관객에게는 보이지 않는 언어로 서로의 몸짓을 조율했다.

다음은 쇼팽의 ‘녹턴’이었다. 흐름이 느리므로 몸짓이 커 보이고 음정이 고요하므로 숨소리도 들린다. 연주자의 눈길이나 동선에 내가 있으면 안 된다. 이 무대의 주인공은 오롯이 연주자 한 명이다. 연주자가 끝까지 악보를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박수가 터질 때마다 나는 더 보이지 않도록 몸을 움츠렸다.

나도 주인공인 적이 있었다. 동문들과 음악회를 열었을 때였다. 나는 친구와 함께 무대에 올랐다. 눈과 귀, 몸짓까지 놓치지 않고 오직 나를 위해 움직였다. 재빨랐지만 보이지 않는 손길이 있기에 나의 연주는 다뉴브강을 미끄러지는 돛단배처럼 순항했다. 내가 주인공이 되게 해주려고 무대 뒤의 사람이기를 자처한 친구가 고마워 눈물이 났다. 다시 친구의 몸짓이 빨라졌다. 흐름이 서서히 느려지면서 친구가 힘을 모아 마지막 음을 찍었다. 정적이 몇 초 흐른 뒤 함성과 함께 박수가 터졌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친구가 연거푸 허리를 숙여 답례했다. 꽃송이와 꽃다발이 한 아름 날아들었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고 다시 갈채가 쏟아졌다. 감동이 밀려왔지만 나는 무엇도 할 수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는 박수 한 조각도 나의 것이 아니다. 꽃송이 하나까지 모두 친구의 것이다. 지금은 친구가 빛나는 시간이다. 친구에게 눈길이 쏠린 사이에 나는 소리 없이 무대를 벗어났다. 내가 무대 뒤에서 안도의 숨을 쉬는 사이 무대 위에는 여운이 한참 더 이어졌다. 화려한 무대 뒤에는 숨은 사람이 존재한다. 혼자만 빛나며 세상을 지배하던 태양도 서쪽으로 이울면 달에게 자리를 비켜준다. 밤하늘은 짙고 망망한 어둠을 무대로 깔고 그 위에 별자리가 뛰어놀 마당을 펼친다. 카시오페아, 쌍둥이자리, 큰곰자리…. 별들이 초롱초롱 뛰어놀기에 밤하늘은 아름답다.

김경아 작가
김경아 작가

바람은 계절의 악보를 한 장 한 장 넘긴다. 해오름달, 시샘달, 물오름달…, 열매달, 초목은 바람의 리듬에 맞춰 자신만의 삶을 연주한다. 흔들리면서도 대궁 끝에 꽃을 밀어 올리고 따가운 뙤약볕을 쬐어 열매를 익힌다. 들판에서 곡식이 춤을 추는 모습을 보면 뒤에 바람이라는 페이지터너가 있다고 믿어도 좋다. 우리는 누군가의 어둠이고 바람이다. 네가 빛날 때 나는 어둠이 되고 내가 춤을 출 때 너는 음악이 된다. 네가 바람일 때 나는 잎새가 된다. 너를 빛내려고 내가 숨어서 도울 때 우리의 협주는 아름다운 진행형 소나타이다.

 

◇ 김경아 작가 프로필 ·수필 오디세이 신인상 ·포항소재 문학상 최우수상(2020) ·포항 스틸에세이 금상(2022) ·청송객주 문학대전 장려상(2022) ·울산 산업문화 축제 최우수상(2014) 외 다수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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