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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애 국회의원, 38년만에 자퇴한 포항여고 초청 특강

이부용 기자
등록일 2023-07-11 16:05 게재일 2023-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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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아픔 이기고 후배들에게 용기주기 위해 방문 <br/>초등학생 해녀, 포항여고 1달 만에 중퇴<br/>3교대 방직공장 여공, 잡화점 점원, 초밥집 사장 등 거쳐

‘약자와의 동행’을 정치 좌표로 의정활동을 하고 있는 국민의힘 김미애 국회의원이 11일 포항여자고등학교를 찾아 특강을 했다. 38년만의 모교 방문이다. 

김 의원은 이날 1, 2학년 400여 명을 대상으로 ‘어떠한 환경도 꿈을 가둘 수는 없다’는  주제로 1시간 동안  강의했다. 

눈물겹고 감동적인 김 의원의 삶은 국회의원 당선 후 주목을 받아왔고, 많은 언론에서 회자됐었다.

이날 후배들 앞에 선 그는 “1985년은 정말 슬픈 해였다”라며 “그토록 가고 싶었던 포항여고에 합격은 했으나 등록금이 없었다. 그래서 중3 겨울방학 때 경남 양산에 있는 깡통 제조공장에 가서 불량품을 선별하는 일을 했다. 당연히 포항여고 입학식도 가지 못했다. 그래서 검정고시로 대학에 가야지 생각했다”고 운을 뗐다.


이어 “그런데 입학 후 1주일 즈음, 오빠가 등록금 넣어뒀으니 학교에 가라고 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라며 “포항여고 배지를 달고 기쁜 맘으로 등교했다. 친구들보다 일주일 늦은 입학이었다”고 당시 상황을 기억했다. 그는 “학교까지 서너 번 버스를 타야 했는데 버스비가 없었다. 걸어서 구룡포 읍내까지 가서 포항시내 오는 버스를 타느라 학교는 매일 지각, 도시락은 챙길 사정이 안 돼 수돗가에서 수돗물로 허기를 달랬다”면서 “참고서도 한 권 없었는데  그래도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있으니 친구들은 내가 공부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내 머리 속은 차비걱정 뿐이었다. 가장 우울한 나날들이었다”고 회고했다.

결정적으로 자존심에 상처가 난 사건이 생겼다. 같은 반 친구들이 불우이웃돕기 모금을 해 줬다. 그걸 교장이 전교생이 모인 조례시간에서 칭찬했다.

그는 “나는 그때 아직 그것을 너그럽게 받아들일 만한 그릇이 못 됐다”라며 “그 주 일요일, 공장에 다니는 친구들이 주말을 맞아 구룡포에 왔더라. 난 그들을 따라 부산으로 바로 갔다. 그날이 포항여고와는 결별이었다. 다만 그 경험 덕에 나는 기부할 때, 받는 사람 입장을 깊이 생각하게 됐다. 이제 세월이 흘러 그 아픔도 모두 이겨냈고, 한참 어린 후배들께 용기를 주고자 오늘 여길 왔다”고 말했다. 


김 의원은 이어 포항여고를 떠난 후 살아간 삶의 여정도 진솔하게 쏟아냈다. 부산으로 내려간 그는 태광산업의 3교대 업무로 사회 첫발을 내디뎠다. 밤 10시부터 새벽 6시까지의 야근 근무가 너무나 힘들었다. 당시 부산에는 일본 관광객들이 많이 방문하던 시기라서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쉽게 취직이 되는 것을 보고 낮 시간에는 일본어를 배우러 다녔다. 

주경야독, 일본어 대화가 가능해지면서 일본인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잡화점에서 일했다. 그렇게 해서 1천500만원을 모았다. 지인에게 1천500만원을 빌린 돈을 보태 부산에 조그마한 초밥집을 열었다. 나름 장사는 잘됐다.

그러나 돈을 벌수록 공허감이 커졌다. 어릴때 꿈을 회복하고자 29살에 동아대 법대 야간학부에 입학했다.고시반에 들어갔다. 새벽 6시만 되면 도서관에 도착, 밤 12시까지 공부에 매달렸다. 기숙사와 세끼 밥을 제공받게 되자 너무 감사, 누군가에게 조금은 도움이 되고 싶었다. 과일 행상을 하는 할머니와 사는 어린 소녀에게 매달 3만원을 후원하기 시작했다. 사법고시도 도전 5년 만에 합격했다. 

변호사가 된 그는 어려웠던 시절을 잊지 않고 약자와 동행하기로 한 스스로의 약속을 실천해 나갔다. 15년 동안 여성, 아동, 청소년 등 사회적 약자와 취약계층을 위한 국선 변호인으로 760건의 사건을 맡아 변론을 하며 주위를 돌봤다. 수많은 비행청소년들을 만나 설득하기도 하고 사고가 나면 무료변론도 해줬다. 감사하는 마음을 사회에 되돌리는 일도 잊지 않았다. 그에게 꿈을 열어 준 모교 동아대학교에 매년 1천만 원 씩 후배들을 위해 장학금 또는 발전기금으로 1억 원을 내놓는가 하면 지금도 세비의 30%를 사회에 기부한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오랫동안 그의 삶을 눈여겨본 국민의힘 측에서 정치권유가 있었다. 정치가 약자들의 삶에 기여하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 그는 이를 받아들였고, 해운대구 을에 공천을 받아 출마, 민주당 현역 의원을 꺾고 국회의원이 됐다. 흙수저 여공의 국회의원 당선은 전국적 관심사가 됐다. 국회에서도 발달장애인 권리보장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 공동발의를 비롯 아동복지법 일부개정법률안 발의 등 형편이 어려운 층을 위해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최근 전국적인 관심이 된 신생아 살해 및 유기 문제도 국회의원이 된 2020년부터 줄곧 제기했고 지난 2월 국회 본회의 때도 울음으로 밖에 표현 못 하는 아기들의 생명을 지켜달라고 호소했다.

김 의원은 이날 후배들에게 “다 잘 할 수는 없다. 모자란다면 지금부터 시작해도 늦지 않다. 꼴찌라도 괜찮다”라며 “나는 여러분보다 10년 늦게 시작해 꿈을 이뤘다”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모두 소중한 존재이다. 환경이 여러분의 꿈을 가둘 수는 없다. 마음껏 꿈꾸라”고 격려하고 “여러분들에게 말한 약자와의 동행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이어가고 실천하겠다”고 약속했다.

특강이 끝나자 후배들은 뜨거운 박수로 화답했다. 강의를 마친 김 의원은 그가 점심시간에 허기를 채우기 위해 자주 갔다는 수돗가를 찾았다. 세월은 흘렀지만 시설은 그대로 있음을 확인한 그는 잠시 감회에 젖기도 했다. 

이날 강당에는 박해자 포항여고 총동창회장 등 동창회 임원들과 권순남 장학회장, 차동찬 전 포항시의원를 비롯한 학교운영위원들도 나와 김 의원에게 꽃다발을 전달하며 따뜻하게 환영했다.

/이부용기자 lby1231@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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