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십갑자 중 마흔네 번째는 정미(丁未)다. 천간(天干)의 정화(丁火)는 아름답게 불꽃이 타는 모닥불이며 촛불이다. 지지(地支)의 미토(未土)는 뜨겁고 메마른 땅이다. 동물로는 양(羊)이다.
정미일주의 정(丁)은 한자로 보면 씩씩한 장정(壯丁)의 의미다. 성할 정(丁), 즉 왕성함과 강성함을 내포하며 정수리라는 뜻이다. 고고할 정(丁), 그리고 바로 잡거나 고친다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미(未)는 나무에 어린가지가 뻗은 모양이며, 기본적으로 부드럽고 온화하지만 유쾌하고 명랑하다. 단아하고 우아하며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 많은 편이다. 예의와 격식을 갖추어 행동하려는 속성이 있다.
물상으로는 모래사막의 건조한 땅. 정오를 지나 태양의 열기가 정점을 이르는 형상이다. 저돌적이고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투쟁심이 있어 어려움이 있어도 굴하지 않고 칠전팔기의 각오로 값진 결과물을 얻어내는 기질이 있다. 하지만 본인의 노력만큼 결과가 따라주지 않아 항상 고민과 갈등이 수반된다.
또한 매력적이며 끼를 발산하려고 하며, 말도 조리 있게 잘하며 총명하다. 자기 스스로를 규율하고 질서를 지키려고 하며, 올바르게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에 집착하여 스스로 결단하지 못하는 단점도 있다. 그래서 속을 내보이는 경우가 드물어서 아주 친하지 않는 이상 속마음을 내보이지 않는다.
정미일주는 한여름의 뜨거운 아스팔트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모습이다. 자존심이 강하고 주관이 뚜렷하다. 팍팍한 현실에서 역경을 참아내는 인내와 버티는 힘이 장점이다. 불굴의 정신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보면 된다.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말한 초인이다.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는 인간의 삶을 세 가지로 나누었다. 첫째는 낙타의 삶이다. 낙타는 타인에게 순응하는 삶을 산다. 무거운 짐을 지고 고된 사막을 걷는다. 등에 맨 짐은 자신의 것이 아님에도 왜 그 짐을 지는지도 모른 채 말이다. 평생을 주어진 역할에 맞게 순응하는 삶을 사는 것이 낙타의 삶이며, 대부분 사람들의 삶이다.
두 번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분명히 알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는 사자의 삶이다. 하지만 항상 긴장과 불안 속에 있기에 진정한 자유로운 삶이라고 할 수 없다.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투쟁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어린아이 같은 삶이다. 천진난만하며 호기심이 충만하고 두려움이 없다. 사소한 갈등이나 슬픈 과거에 대해 금방 잊고 새로운 것을 시작한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매일매일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발전 가능성이 있는 삶이며 놀이다.
정미일주의 여성은 꾸미는 것을 좋아하고 도도하며 매력적이다. 먹는 것을 좋아하고 가정살림을 잘하는 편이다. 남자로 인한 문제 또는 손실이 있을 수 있으니 이성문제에 주의해야 한다. 몸이 약할 수 있으니 건강관리에 신경을 써야 한다.
남성은 외모가 좋은 분이 많다. 성미가 급한 편이며, 적극적인 성격으로 이성을 유혹하는데 뛰어나다. 직업변동이 많은 편이다. 추진력이나 실력이 좋아 이성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인기가 많다. 다정다감한 모습이나, 상대방을 배려하는 모습이 부족한 것은 흠이다.
정미일주의 미토(未土)는 양기에서 음기로 넘겨주는 중간 역할을 한다. 아직 미완성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까닭에 음력 6월은 과일이 성장하여 완벽한 것처럼 보이지만, 아직 여물지 않고 맛이 들지 않아 아직 햇빛이 더 필요한 단계다. 겉으로는 강하게 보일지라도 사실은 고독한 편이다. 혼자만의 아픔이나 슬픔을 곱씹는 성격으로, 어둡고 우울함과 온화하고 배려가 공존한다.
미(未)는 동물로 양(羊)이다. 사주에 양이 있는 분은 본인이 완벽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완성되었다고 하지만 실상은 아직 미완이다. 그래도 인내심이 강하기 때문에 잘 헤쳐 나간다. 이러한 특성으로 한 곳에 집중하는 장인정신을 가진 인물이 많다. 자신만의 능력과 기술로 독립적으로 살아가길 원하는 성향이다. 나이보다 정신적으로 성숙한 면이 있다.
양(羊)은 무리를 지어 생활한다. 동화에서 보면 순한 이미지로 나온다. 예민한 성격으로 무리에서 이탈하면 곤경에 처해진다. 양 중에는 천연기념물 산양이 있는데, 높은 산악지대에서 살아간다. 생활하는 환경에 따라 살아가는 방식이 다른 것이다. 김정한(1908∼1996)의 소설 ‘축생도’는 무리에서 이탈한 상황이 본질적인 문제와 마주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농촌에서 힘들게 사는 분통이가 산후조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바람에 젖 붓는 병에 걸려 목숨이 경각에 달하게 된다. 몇몇 병원을 전전한다. 치료비가 나올 것 같지 않은 가난한 농사꾼 부부의 몰골 때문에 번번이 문전박대를 당한다. 할 수 없이 가축병원을 찾게 된다. 결국은 수의사한테 응급수술을 받고 간신히 목숨은 건진다. 그러나 수의사는 이 일로 보건의료법에 걸려 처벌을 받는다.
동물의 질병만 다루는 수의사가 감히 사람의 병을 고치는 의사 행위를 했다는 게 죄목이다. 분통이네가 병원 문을 두드렸을 때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의사들이 당국에 신고했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뱁새가 황새 노릇을 했기 때문이다. 수의사는 고통 받는 사람을 차마 외면할 수 없기 때문에 조건 없이 의사 역할을 한 것이다. 우리는 수의사를 단죄할 수 있을까?
오로지 권력의 야욕으로 황새처럼 날려거나, 향락의 허영으로 황새처럼 걸으려는 뱁새들이 있다. 뱁새가 감히 황새를 넘보는 것은 그저 분수를 지키지 못한 실족 정도가 아니라, 범죄에 해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축생도에서처럼 가랑이가 찢어질 위험을 감내해야 하는 뱁새들을 우리는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옛말에 ‘고갈지어 상유이말(<51C5>渴之魚 相濡以沫)’이라 했다. 물이 마른 곳에 들어 있는 고기들이 침을 내어 서로를 적셔 준다는 뜻이다.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다. 예전에는 개천에서 용이 난다고 했다. 그래도 기회가 균등하게 있었기에 가능한 이야기다. 지금은 누구나 용이 될 수 없는 상황이다. 태어난 환경과 장소가 운명을 결정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