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예쁜 후배랑 갔다. 언제든 어디든 동행을 청하면 항상 선선하다. 일하는 이 불러내 미안하다 싶다가도 거조암의 오백나한을 꼭 보여주고픈 마음이 컸다. 이미 잡혔던 약속을 취소하고 한달음에 집까지 와서 나를 차에 태운다. 작년까진 늘 남편과 함께였다. 설 연휴를 보내고, 정월대보름 전에 꼭 하루를 비워 오백나한을 뵈러 간 지 여러 해째다.
집에서 차로 한 시간 남짓, 평탄하고 넓은 길을 지나 그다지 가파르지 않은 산길을 조금만 오르면 도착하는 한적한 길 끝에 일주문이 다소 생뚱맞게 서있다. 영산루를 머리에 얹고 가파른 계단을 지나면 정갈하고 말간 마당에 얌전한 삼층석탑이 있다. 탑 뒤에 영산전이 튼실하게 앉아있다. 단청 화려하고 삼면이 문으로만 되어있는 여느 절들과 달리 장식없는 흙벽이다. 동서로 길쭉한 전각 한가운데 여닫문이 있고, 창문이 좌우로 4개 달려있다. 단정하고 고졸하다 싶은데 무려 국보다. 영산전 안에 나한상이 오밀조밀 빽빽이 좌정해있다. 오백나한은 500위가 아니고 실은 526위라 한다. 흰 회를 얇게 바른 얼굴과 몸에 알록달록 채색을 한 석조상들이다. 하나하나 그렇게 다채로울 수가 없고 자세나 표정이 하나도 같은 이가 없다. 진지한 모범생은 가끔 보이고 대부분이 앉음새도, 표정도 익살스럽다. 입고 있는 옷색이며 들고 있는 물건도 가지가지다. 수염이 있는 이, 없는 이, 수염의 모양도 같은 이가 없다. 모자 쓴 이도 있고, 껄껄껄 웃거나, 미소짓거나, 하품하거나, 곁눈질하거나, 옆 친구와 속삭이는 이, 경전, 염주, 목탁에 포도, 귤 같은 과일을 가진 이, 호랑이나 사슴 등의 동물을 안고 있는 이도 있다. 심지어 거꾸로 물구나무 서있는 나한상이라니.
법당에 들어서면서 6만원의 보시금을 백원짜리 동전으로 바꾼 돈바구니를 얻는다. 삼존불에 삼배한 후 번호대로 화살표를 따라 나한의 명호를 입속으로 부르며 앞앞이 놓인 쟁반에 동전 하나 놓고 합장례를 한다. 추워서 손은 곱고, 동전 육백 개의 무게가 만만찮지만 면면이 다른 나한상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주황색 법의를 입고 왼무릎을 세우고 손을 소매 속에 감춘 불소소존자 옆에 연두색 법의의 견유변존자가 흰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다. 화장존자는 왼손으로 목탁을 쥐고 오른손 다섯 손가락을 모두 입에 넣어있고 그 옆 광명존자는 염주를 두 손으로 다소곳이 쥐고 있다. 둘 다 수염이 없는 걸로 봐서 젊은이신가 모르겠다. 두 손을 모두 큰 입 속에 넣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성무진존자는 앞섶도 열어젖혀 둥근 배속살을 다 보인다. 도리천존자는 귀가 어두우신가 오른손을 귀 뒤에 대고 옆얼굴을 하고 있다. 보시금을 바꿔준 보살님은 한가지 소원만 외라고 했다. 나한들의 표정을 보고 명호를 부르다 보면 그 소원은 까맣게 잊힌다. 그들의 공부방에 나도 함께 들어와 있는 느낌이다. 돈바구니가 가벼워지고 번호가 높아질 무렵이면 그저 환희심만 가득해진다. 함께 간 후배는 시각디자인을 전공했다. 이 나한상을 캐릭터로 개발하면 어떨지 제안해 본다. 151개나 되는 포켓몬스터에 비할 바가 아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