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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술(甲戌)

등록일 2022-06-22 18:34 게재일 2022-06-23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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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온作 ‘Raining’

육십갑자 중 열한 번째에 해당하는 갑술(甲戌)이다. 천간(天干)은 갑목(甲木), 지지(地支)는 술토(戌土)다. 12지지를 10천간과 개수로 비교하면 둘이 남는다. 바로 술(戌)과 해(亥)이다. 어찌 보면 ‘윤달’과 같다. 하늘에는 없는데 땅에 있는 기운. 그래서 갑술(甲戌)에서 주인공은 술(戌)이다.

술(戌)은 동물로는 개다. 개는 참으로 영리하며, 우리가 누구라는 것을 잘 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정체를 알고,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귀신을 보기도 하고, 후각이 좋아 항상 주위를 잘 경계한다.

사주팔자 중에 개 술(戌)의 기운을 가진 사람들은 뭔가 배우고, 갖추고, 공부하고, 만나고, 듣고, 말하고 하는 것을 참 좋아한다. 아마도 천기(天氣)가 없어 지기(地氣)만으로 살아야 하기에 그런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혜는 없어도 경험을 통한 지식은 엄청나게 많다. 특히 재복도 많고, 바쁘고 친하면서도 제멋대로고, 여자건 남자건 이성을 좋아하고, 종교가 있어도 하느님이나 부처님이나 다 자기와 동급이라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대장도 아닌 게 대장이라고 하니 밉지는 않다.

갑술생(甲戌生), 개띠들은 ‘진짜 눈먼 개띠’라고 한다. 결혼운도 좋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합리적이고 현실적이라서 인생 초창기는 고생을 많이 하지만 나중에는 부자가 되는 사람들이 많다고도 한다.

갑술 일주는 매우 활달하고, 성공이나 출세나 여하간 남들보다 잘 되기 위해서 몹시 분주한 사람들이다. 몸이 바쁘고 고단할 정도로 나름 열심이며, 의타심이 강해 누군가 자기를 도와줄 사람을 항상 찾는다. 나쁘게는 상대방을 항상 의지하고 이용하려고 한다. 그러나 위급상황에서 자기를 희생하는, 주인에 대한 충성심 하나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임진왜란(1598년) 때 왜장을 안고 남강에 투신한 논개의 일주(日柱)가 갑술(甲戌)이다. 조선 중기 유몽인(1559∼1623)이 엮은 설화집 ‘어우야담(於于野譚)’ 권1 효열(孝烈)편에 논개에 대한 글이 있다.

논개(論介)는 진주 관기(官妓)였다. 계사년(1599년)에 김천일이 의병을 일으켜 진주를 근거지로 왜병과 싸우다가 마침내 성이 함락되어 군사는 패하고 백성은 모두 죽었다. 이때 논개는 분단장을 곱게 하고 촉석루 아래 가파른 바위 꼭대기에 서 있었으니 아래는 만길 낭떠러지였다. 사람의 혼이라도 삼킬 듯이 물결이 넘실거렸다. 왜병들은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침을 삼켰지만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그런데 왜장 하나가 당당한 풍채를 자랑하며 곧장 앞으로 나아갔다. 논개는 요염한 웃음을 흘리면서 왜장을 맞았다. 왜장의 손이 그녀의 몸을 잡자 논개는 힘껏 왜장을 끌어안는가 싶더니 마침내 몸을 만길 낭떠러지 아래로 던졌다. 그 둘은 모두 죽고 말았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관기의 경우 왜놈에게 욕을 당하지 않고 죽은 이가 어찌 논개 한 사람에 그치겠는가? 이름도 없이 죽어 간 여인들을 일일이 다 기록할 수 없는 것이 한이다. 관기라 하여 왜적에게 욕을 당하지 않고 목숨을 끊었다고 할지라도 정렬(貞烈)이라 칭할 수 없으니 어찌하랴. 그러나 그런 도랑물 같은 신세로서도 또한 성화(聖化)할 수 있는 정신이 있었으니 나라를 등지고 왜적에게 몸을 바치는 것을 차마 하지 못했다면 그것을 충(忠)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참으로 아까운 일이다.

나라에 충(忠)하는 것이 오직 사대부만의 전유물이 아닌 것이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을 지키기 위해서 이름 없이 사라져 간 약자들을 기억하고, 그들에게 동등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현재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된다.

갑목(甲木)은 솟구치려는 경향이 있고, 술토(戌土)는 홀로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개의 모습이다. 쓸쓸함이 묻어난다. 그래서 갑술 일주는 활동적이며, 허허벌판에서 홀로 솟은 나무답게 독립심도 강하다. 인간 친화적인 개와 비슷하게 갑술 일주는 대체적으로 대인관계가 좋은 편이다. 사람은 홀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같이 갈 도반을 소망하는 것이다. 자기의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갈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인관계가 좋다는 것은 본인의 내면이 공허한 것과는 다르다. 갑술 일주의 내면은 고독할 수 있으나 겉으로 볼 때는 남들과 조화롭게 잘 어우러진다.

영국의 여류작가 매리 루이스 드 라 라메의 동화 ‘플랜더스의 개’가 있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할아버지와 같이 사는 가난하고 어린 넬로와 늙은 개 파트라슈의 이야기다. 화가를 꿈꾸며 평소에는 볼 수 없는 성당 안에 있는 루벤스의 그림을 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크리스마스 전날 자정미사가 끝난 뒤 성당 문은 잠기지 않은 채 그냥 열려 있어서 넬로와 파트라슈는 성당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루벤스의 작품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그림이 한 순간 찬란하게 눈에 들어왔다. 넬로는 그림을 향해 두 팔을 뻗었고, 뜨거운 환희의 눈물이 창백한 넬로의 얼굴에서 반짝였다. “마침내 그림을 봤어! 오 하나님! 이제 됐습니다.”라고 외쳤다. 그렇게 소원하던 그림을 보고, 굶주림과 추위에 떨면서 넬로는 충실한 개 파트라슈와 함께 죽어갔다.

류대창 명리연구자
류대창 명리연구자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 따르면, 개는 사람이 길들인 최초의 동물이다. 정확한 시기에 대한 주장은 엇갈리지만 약 1만5천년 전에 이미 가축화된 개가 존재했다는 증거도 있다. 개는 사냥과 싸움에 이용되었으며 집을 지키는 파수꾼 역할도 했다. 세대를 거듭하면서 사람과 개는 서로 의사소통이 잘 되도록 진화했다. 사람과 개는 사람과 다른 동물의 관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북부 이스라엘에서 발견된 1만2천년 전의 무덤에는 50세 정도의 여자와 강아지 뼈가 들어 있었다. 강아지는 여자의 머리 가까이에 묻혔다. 그녀의 왼손은 개 위에 놓여 있었는데, 이는 감정적 유대관계를 나타낸 것으로 해석된다. 죽음의 동반자로서 애완견이 장례의식에 사용됐을 가능성이 있다.

광활한 우주에 푸른 작은 별, 지구에는 인간만이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동물이 서로 공존하며 풍요로운 관계로 살아가길 바랄 뿐이다. 한 해에 버려지는 개가 10만 마리나 된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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