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세 노병의 잃어버린 훈장 < 3 >
먼저 1950년 9월 14일 장사상륙작전에 학도병으로 참전한 이영희(91)씨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 본다.
“출동 전날인가, 출동하는 날이었던가…. 교관이 손톱과 발톱, 머리카락을 깎아서 나눠준 봉지에 넣으라고 하더군요.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몰랐지. 나중에야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군사작전에 동원된 사람들이 치르는 일종의 의식이란 걸 알았죠. 근데, 한참 후 들어보니 그때 700명 넘는 우리 전우들이 잘라낸 손발톱과 머리카락은 보관하지도 않고 버려졌다고 하더라고요.”
아래는 이씨의 증언을 뒷받침해주는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양영조 책임연구원의 논문 ‘6·25전쟁 초기 장사상륙작전의 전개과정과 성격’의 일부다.
“1950년 9월 14일 오전 육군 독립 제1유격대대(장사상륙작전 학도병 부대)는 육본 연병장에서 출동준비를 완료하였다…(중략) 출정식에 참석한 유격대 대원들은 육군본부 연병장에 질서정연하게 집합했다. 이들 전원은 출동에 앞서 각자의 머리카락, 손톱, 발톱의 일부를 잘라서 봉투에 넣어 육본에 보관시켰다. 작전지역으로 출동하기에 앞서 죽음을 각오하자는 결의의 표시였다.”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겠다는 순수한 애국심에 입대를 자원한 학도병 772명. 그들은 손발톱과 머리카락을 깎은 그날 오후 부산항 4부두를 출발해 ‘죽음이 기다리는’ 장사해변으로 떠났다. LST문산호를 타고서였다.
그중 139명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고, 100명이 넘는 이들이 다치거나 조선인민군의 포로가 되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군인이자 소설가였던 월터 카릭(Walter Karig·1898~1956)은 ‘6·25전쟁에 관한 전투 보고서(Battle Report the War in Korea)’에 “독립 제1유격대대의 유격대원들 중 약 80%에 해당하는 600여명이 주로 18~19세에 불과한 학생들이었고, 심지어 15세의 어린 학생도 일부 포함돼 있었다”고 기록했다.
LST문산호 대기 부산항 출발 전
손발톱·머리카락 깎아 보관 명령
알고보니 위험작전 전 치르던 의식
유격대원 대부분이 18~19세 학생
15세 어린 학생까지 동원됐지만
1997년 장사해안서 좌초된 문산호
발견 후 비로소 역사 속에서 부활
극비작전으로 분류, 군번 부여 않아
인사기록 부정확… 공적평가 외면
인천상륙 성공 이끈 ‘숨은 영웅들'
정확한 ‘사실 확인' 선결 과제로
△ 장사상륙작전은 어떤 이유로 잊혀진 전투가 됐을까
“한국전쟁의 전세를 역전시킨 인천상륙작전에 도움을 줬다” “낙동강 전선에서 고전하던 한국군 제1군단의 작전에 기여했다”는 군사전문가들의 호평이 있었음에도 어째서 장사상륙작전은 2009년 한국프레스센터에서의 학술세미나가 개최되기 전까지 59년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을까?
10대 후반에서 20대 초·중반이던 학도병과 청년지원병이 주축이 됐던 ‘육군 독립 제1유격대대’는 국군 총참모장이 서명한 ‘육본 작전명령 174호’에 의해 상륙작전과 전투에 투입됐다.
북한군의 동해안 보급 루트를 끊고, 당시 조선인민군 최정예 제2군단의 2개 연대와 전차에 맞서 용맹한 전투를 벌였음에도 왜 장사상륙작전 학도병들에겐 훈장 추서와 수여라는 희생에 값하는 위로와 격려가 없었을까?
2020년 8월 발표된 군사편찬연구소 박종상 책임연구원의 논문 ‘6·25전쟁 시 장사상륙작전에 대한 재검토’는 “많은 시간이 지나 장사상륙작전이 일반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가고 있을 무렵인 1980년 7월 14일 참전자들에 의해 ‘장사상륙참전유격동지회’가 결성됐다”고 쓰고 있다.
이 논문에 의하면 장사상륙작전이 새롭게 조명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97년 3월 6일 장사리 앞 해안을 수색하던 해병대 제1사단 해병대원이 바닷속에 묻혀 있는 LST문산호를 발견한 이후”다.
장사상륙작전이 있은 후 70년이 지나서야 만들어진 영덕 장사해변의 전승기념관. 지난 3월 중순 이곳을 찾은 학도병 류병추(장사상륙작전기념사업회장·91), 이영희, 청년지원병 배수용(99)씨는 “아마도 우리들은 희생양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큰 전투(인천상륙작전)의 승리를 위해 희생자가 발생할 것이 분명한 작은 전투(장사상륙작전)에 투입된 어린 군인들.
그들에겐 군번도 없었다. 그러니, 문서로 남은 인사 기록이 정확하지 않고, 전투에서 세운 공적에 대한 명확한 평가 또한 없다.
참전 후 70년이 지나서야 육군본부에서 받아본 류병추 회장의 ‘거주표’엔 정확한 예편 일자와 생년월일은 기록돼 있지만, 이름조차 오기(誤記)돼 있다. 류병추가 아닌 ‘유병식’으로 적힌 것.
이런 상황을 감안한다면 “한국전쟁 당시 미군과 한국군 문서에 실명과 공적이 정확하게 기록된 분들에 한해 서훈 추천을 할 수밖에 없다”는 육군본부의 해명은 옹색해 보인다.
△ 조선인민군 군가까지 배우며 분투한 학도병은 희생양?
희생양은 ‘다른 사람의 이익이나 목적을 위해 목숨, 재산, 명예, 이익 따위를 빼앗긴 사람’을 비유하는 단어다.
그런데, 장사상륙작전 참전 학도병들은 지향점이 판이한 ‘다른 사람’을 위해 싸운 게 아니었다.
류병추, 이영희, 배수용 씨를 포함한 장사상륙작전 참전 학도병과 청년지원병 772명은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와 친구, 이웃, 더 큰 의미에선 조국을 위해 기꺼이 희생을 자처한 젊은이들이었다.
그러니, 사전적 의미의 ‘희생양’과는 다른 형태로 해석되고, 평가받아야 마땅하지 않을까.
1950년 8월 대구역 앞엔 ‘내가 총을 들고 전장에 나가는 것이 나라에 작은 도움이라도 된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는 젊은 혈기와 신념으로 참전을 결심한 학도병 지원자들이 수천 명 모여들었다.
장사상륙작전에 투입된 학도병도 바로 여기서 선발됐다. 부모에게 제대로 된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고 기차에 오른 이들은 경남 밀양에 도착해 쌀을 보관하던 창고에서 가마니를 깔고 자며 낯선 군사훈련을 받았다. 식사라곤 차갑게 식은 주먹밥이 전부였다고 한다.
류병추 회장은 2주간 훈련을 받던 그 시기를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1주일쯤 지났을 때다. 교관이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손을 들라’고 했다. 손을 든 이들에겐 귀가가 허락됐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10명 중 1명도 되지 않았다.”
당시 스물여섯 살이던 배수용 씨는 “나이가 많으면서 모범적으로 하지 못한다고 조교에게 맞기도 많이 맞았다”고 했다.
그럼에도 절대다수의 학도병들은 편안한 집 대신 생명을 걸고 싸워야하는 전투 현장으로 가겠다고 스스로 선택했다.
장사상륙작전은 조선인민군이 점령한 지역으로 학도병을 보내는 것이기에, 여차하면 인민군으로 위장하기 위해 북한 군가까지 배웠다.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 자욱”으로 시작하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다. 배수용, 류병추, 이영희 3명의 노병은 아직도 그 노래의 가사를 기억하고 있었다.
이전까진 총 한 번 쏴본 적 없는 어린 학도병들은 그렇게 부산항 4부두를 떠나 조선인민군 2군단이 버티고 있는 영덕군 남정면 장사해변으로 떠났다. 앞서 언급한 ‘육본 작전명령 174호’가 그들을 사지(死地)로 보냈다.
1950년 9월 14일 오후 4시였고, 동해가 태풍 케지아(Kejia)의 영향권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한 날이었다.
육본 작전명령 174호는…
독립 제1유격대대 보급·수송 지시 명령서… 참전 학도병 명백히 밝힐 자료 활용해야
한국전쟁 때 국군 최고 책임자였던 총참모장 정일권(1917~1994) 소장의 직인이 찍힌 ‘육본 작전명령 174호’는 단기 4283년(1950년) 9월 10일 작성됐다.
경북 포항과 안강의 전황을 설명하고, 작전에 참여할 독립 제1유격대대의 보급과 수송, 통신과 의료 관련 사항을 지시하고 있는 이 명령서는 ‘군사 극비’로 분류됐다.
장사상륙작전에 투입된 학도병과 청년지원병은 바로 이 육본 작전명령 174호에 따라 이동·상륙·상륙 후 전투를 수행했다. 이는 명백하게 남아있는 ‘한국전쟁 당시 관련 문서’다.
이를 토대로 참전 학도병의 이름을 찾아내 확인하는 게 대한민국 육군본부나 국방부에겐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참전자들의 전공(戰功)은 이미 각종 군사 관련 문헌이나 자료가 있으니 확인이 가능할 것이다. 정확한 성명과 전공. 현재 법률로선 훈장 추서와 수여는 이 두 가지가 선행돼야 가능하다.
장사상륙작전 생존 학도병들은 입을 모은다.
“지금 와서 공명심에 훈장을 바라는 게 아니다. 국가가 우리를 잊지 않았다는 걸 확인받고 싶다”고.
장사상륙작전 전우 772명 중 현재 생존자는 20명이 채 되지 않는다. 이미 아흔을 넘긴 그들에겐 시간이 많지 않다.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다’는 군인의 본분은 장성과 학도병이 다를 리 없다. 정일권 소장은 1950년 을지무공훈장을, 1951년엔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