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십갑자의 두 번째 을축(乙丑), 하늘에는 을목(乙木)이라는 힘이 나타나는 시간이고, 땅에서는 소(축토·丑土)의 성질과 같은 기운일 때 하늘의 그 기운을 잘 소화하는 때다. ‘소 축(丑)’이 아직 간신히 동지(冬至)를 지닌 ‘을목(乙木)’을 만난 형태며, 을목(乙木)을 ‘겨울 들판의 풀 위에 소가 앉아있는 형상’이라고 한다. 겨울 들판에 소가 나가면 먹을 것이 많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고삐에 묶여서 뼈 빠지게 일하는 것도 아니고 팔자 좋게 외양간에서 김이 펄펄나는 ‘여물’을 오무작거리며 먹기만 하면 된다.
소 축(丑)은 추운 겨울을 잘 이겨내고 갖가지 고난과 고초가 많지만 끈기와 생명력을 지녀서 기죽지 않고 봄의 농사일을 위하여 부지런히 일해서 덕을 베풀며 근면 성실하고 집념이 강하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삶을 특징으로 한다.
소는 한번 삼킨 먹이를 다시 게워내어 씹는 특성을 가진 동물이다. 소의 입은 하루 종일 바쁘다. 낮에는 뜯은 풀을 씹느라 바쁘고, 밤에는 낮에 뜯어 먹었던 풀을 게워서 이를 다시 씹느라 바쁘다. 바로 되새김질을 하느라 바쁜 것이다. 그래서 축(丑) 소띠는 말을 많이 하는 경향이 있다고들 한다. 말을 많이 하게 되면 모든 화의 원인이 되며 분쟁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백호 윤휴(尹鑴·1617∼1680)의 ‘백호집(白湖集)’ 언설(言說)에 따르면, 말을 잘하는 것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지금은 말하는 기술을 가르치려 애쓸 시기가 아니다. 말하기 전에 먼저 생각하도록 하고, 천천히 말하게 하며,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일러주어야 할 때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말솜씨는 자연스럽게 체득된다. 외향적이라고 해서 말을 잘하는 것이 아니며, 내성적이라 해서 말을 못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헛된 걱정을 버리자.
옛 사람이 말하기를, 말은 간단하게 하는 것을 소중하게 여겼다. 말은 자신의 뜻을 펼치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간단하게 하려는 것이겠는가? 말할 만한 것을 말해야 하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말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을 과시하는 말은 말하지 않아야 하고, 남을 헐뜯는 말을 말하지 않아야 하며, 사실이 아닌 말을 말하지 않아야 하고, 바르지 못한 말은 하지 않아야 한다. 말을 하는데 이 네 가지를 경계한다면 말을 적게 하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적게 하게끔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옛사람이 말하기를 “군자의 말은 부득이한 경우에만 말한다”고 하였고, 또 “좋은 사람의 말은 적다고 하였는데 부득이한 경우에 말해서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말을 적게 하게끔 되는 이유다.
조선 숙종 6년(1680년) 서인이 남인으로부터 정권을 빼앗은 경신환국으로 말미암아 당대 최고의 유학자 윤휴(尹鑴)는 소주와 사약을 마시고 생을 마감했다. 그 배경에는 ‘천하의 이치란 한 사람이 모두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는 ‘반주자적’ 입장 때문에 주자를 절대적 가치로 여긴 서인들로부터 사문난적으로 몰렸고, 개중에서 주자학을 통해 신분 질서를 강화하고 양반 사대부의 특권을 굳히고자 했던 송시열의 사주와 모략이 크게 작용했다.
생각이 다르면 안 쓰면 그만이지 죽일 필요까지는 없지 않느냐고 반문해본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서로를 인정할 때 진정한 대화를 이룰 수 있다.
대화는 독백과 달리 상대가 있다. 대화의 윤리가 필요한 이유다. 이상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지켜야 할 윤리가 필요하다. 의사소통도 능력이다. 말 잘하는 재능이 아니라 상대의 입장을 존중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능력이다. 위르겐 하바마스는 이상적 의사소통이 가능하기 위한 네 가지 조건을 들고 있다. 첫째, 이해가능성이다. 서로가 상대 말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쉬울 것 같지만 이것조차도 쉽지 않다. 둘째, 진리성이다. 사실적으로 참인 말을 해야 한다. 너무 당연하다. 거짓으로 대화할 수는 없다. 셋째, 정확성이다. 자신의 주장의 근거를 정확하게 제시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진실성이다. 태도의 문제이다. 얼마만큼 신뢰성을 보여줄 수 있는가이다. (김영필 ‘우리 시대의 철학적 문제들’에서 인용)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겉모습을 다듬어 치장하고 말솜씨를 단련하여 나라에 자기의 재능과 기술을 아주 크게 부풀려서 팔고 있다. 알고 보면 그러한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 있는 경우가 생각 밖으로 많다. 나라가 안정되고 큰일이 없을 때에는 설사 삼 년이 넘도록 그러한 사람이 그 자리에 있어도 크게 잘못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라에 큰일이 일어나게 되는 경우에는 마치 속이 텅텅 비고 가죽이 이미 썩은 흙처럼 문드러진 채찍으로 말을 다스리는 것과 같다. 그렇게 되면 어찌 그 사람 혼자만 몸을 망치고 부끄러운 이름을 후세에 남기게 되는 일에 그칠 것인가. 나라에까지도 그 환란이 미쳐서 나라의 질서와 기초를 흔들어 놓게 되는 것이다.
소의 되새김질을 돌아보며 ‘말잔치’에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위해 남이 하는 말을 꼼꼼히 되새겨보는 지혜가 필요하지는 않을지? ‘소에게 하는 말은 새어나가지 않지만, 아내에게 한 말은 새어나간다’는 우리 속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