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모임에서 박웅현의 ‘다시 책은 도끼다’를 읽고 느낌을 나눴다. 밑줄 친 문장 중에 풍류에 대해 정의를 해 놓은 부분이다. 그림 설명해주는 손철주님은 봄이면 탐매하러 가자고 지인들에게 연락한다. 몇 날 몇 시에 모여서 2박 3일 일정으로 매화 향기를 느끼러 가니 참석하라고 말이다. ‘탐매’라는 낱말이 국어사전에 나온다. 탐매하다, 탐매객, 이런 표현이 있을 정도이다. 그렇게 매해 탐매를 떠난다고 하니 그게 바로 풍류라고 한다. 그럼 나도 풍류객이다. 계절마다 피는 꽃을 찾아 나서니 말이다.
지금은 가을, 오늘은 구절초를 보러 갔다. 서악동 도봉서당 뒤에 구절초가 있다는 소문을 들은 지 몇 년째인데 이제야 가게 되었다. 일하는 지인들의 시간에 맞추다 보니 어스름 녘에 찾아갔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는데 눈앞이 환하다. 삼층탑 주변에 하얀 꽃잎으로 수를 놓았다. 구절초가 언덕을 덮고 있다.
해가 산 너머 집으로 서둘러 가느라 붉은 그림자가 서악동에 내렸다. 어두워지기 전에 얼른 꽃밭을 눈에 넣어야 했다. 차에서 내리니 서늘한 기운이 골짜기에 가득할 뿐 늦은 시간이라 인적은 끊겼다. 그래서 구절초밭이 온통 우리 차지였다. 밭고랑 사이를 거닐자 은은한 가을 저녁 향내가 풍겼다. 아, 좋다~하는 소리가 서로의 입에서 나와 미소짓게 했다.
언덕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탑 주변을 하얀 구절초 병정들이 에워쌌다. 그 옆으로 서당 기와의 색이 짙어 꽃이 더 환하게 돋보였다. 골짜기를 둘러싼 소나무 숲은 어두워져도 꽃밭엔 어둠이 더디게 내렸다. 덕분에 천천히 구절초를 탐하는 시간을 가졌다.
일행 중에 오 학년 사내아이 둘이 구절초 사이로 뛰어다녔다. 사진을 찍어 저녁을 먹은 후 포토제닉상을 뽑겠다고 했더니 카메라를 향해 열심히 포즈를 취해준다.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박중훈과 안성기의 명장면도 재현하고, 어깨동무도 했다가 슈퍼맨도 되어주었다. 별 이야기 아닌데도 까르르 웃고 조잘거리는 소리가 꽃이 피어나는 소리와 닮았다.
깜깜해져 꽃이 보이지 않을 때 즈음 산을 내려왔다. 구절초를 간직한 서라벌 하늘 위로 달이 둥실 떠올랐다. 달이 이지러진 곳 하나 없이 동그랗다. 오늘이 보름인가, 달력을 찾아보니 음력 시월 십육 일. 어제가 보름이었다. 낮 동안 포항은 종일 비가 내려 꽃을 보러 못 가겠구나 했다가 오후 5시쯤 구름이 걷혔다. 경주로 와보니 땅이 젖지 않아 여긴 비가 오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이래서 계획대로 움직여야 한다는 걸 또 느꼈다.
도솔 마을에서 경주의 맛을 느끼며 찍은 사진을 자세히 보았다. 멋진 사진의 주인공에게 문화상품권을 주기로 해서인지 잔뜩 기대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다. 어른 셋이 사진을 돌려보며 어느 게 더 좋다 하며 이야기를 나누다 두 아이에게 ‘천원이라 미안해’하며 만 원짜리 상품권을 줬더니 받자마자 입이 함지박만 해졌다. 그 얼굴이 구절초처럼 방싯거린다. 아이들이 꽃보다 곱다.
가장 행복할 때는 맛있는 거 먹으면서 다음에 뭐 먹을지 의논할 때이다. 구절초 보고 와서 남은 가을에 어디로 탐추하러 떠날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양의 핑크 댑싸리가 시월 말이면 절정이고, 안동 시내 낙동강 둔치의 핑크뮬리 보고 헛제삿밥 먹는 코스도 좋다. 경주 최제우 동상이 있는 천도교 성지 용담정으로 가는 길이 은행나무 가로수이다. 곧 노랗게 물들어 우리를 부를 것이다. 조금 멀리 눈을 들면 순천만의 낙조가 보인다. 갈대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바람과 같은 방향으로 흔들리면 우리도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노을을 보면 좋은 곳이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니 파주출판단지 지혜의 숲의 높은 책장 앞에서 인증샷을 찍으면 더없이 좋은 여행이 된다. 가을을 탐할 곳이 끝도 없이 튀어나온다.
배불리 가을을 채우고 경주의 밤거리를 걸었다. 보름달이 더 높이 솟았다. 아이들이 신나서 앞서서 뛰어갔다. 달을 배경으로 한 컷의 꽃 사진을 더 찍었다. 신라의 달밤이다. /김순희(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