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부터 포구가 머릿속에 똬리를 틀었다. 모양이며 맛이 생생하여 눈앞에 삼삼하다. 먹어보고 싶은 마음이 커 큰 시장에 가 봐도 보이지 않았다. 아직 맛이 그대로인지 확인하고 싶어 포구를 먹고 싶은 갈증은 점점 커졌다. 가을바람이 귓불을 스치면 입맛을 다시고는 몸살을 앓곤 했다.
포구는 토종 보리수 열매다. 보리똥, 물포구, 보리수로 불리기도 하지만 내 고향에서는 포구라 불렀다. 동글동글 작은 알이 조롱조롱 모여 열린다. 빨간 열매에 흰 반점이 무늬를 만들고 속에 씨를 품고 있다. 산에서 만나면 알알이 눈을 붙잡아 손이 바빴다. 주섬주섬 따 먹으며 주머니에 담고 보자기에 싸서 집에 가져 왔다. 알불 아래서 깨끗이 다듬어진 포구는 어머니가 이고 장으로 갔다.
포구, 알싸한 그리움으로 가는 티켓이다. 한 알씩 먹는 것보다 한 움큼을 입안에 털어 넣고 씹어야 맛있다. 와작 씹으면 살짝 떫은맛에 이어 새곰한 맛이 몸을 부르르 떨게 한다. 연달아 우물거리면 달큼한 맛이 혓바닥을 어루만진다. 어느 해의 일이다. 그때는 자취를 하던 때이고 전화도 없어 서로 연락이 잘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퇴근하고 집에 오니 어머니가 설탕을 솔솔 뿌린 포구를 먹으라고 주었다. 숟갈로 푹푹 떠먹었다. 어저께 먹어본 듯 선명한 감각이다. 입술에 붉은 물 들이며 뛰어다녔던 고향의 풍경도 스르르 살아난다.
간만에 소꿉친구들을 만났다. 포구하면 생각나는 추억이 있는지 물었다. 산에서 포구를 따다가 가시에 찔렸던 일, 벌집을 건드려 줄행랑을 치다가 땄던 포구를 엎었던 일, 어느 골짜기에 많이 있어서 몇 번이나 따러 갔던 일 등. 그 시절의 추억담이 쏟아졌다. 포구라는 말에 저마다 잊었던 산천을 떠올리며 그땐 그랬지, 아련한 웃음이 걸렸다.
나는 어릴 적 시간을 더듬는 여행이 잦아졌다. 포구가 만들어낸 길이다. 오징어게임과 숨바꼭질하던 골목, 산딸기, 머루, 망개, 포구를 따먹던 산이며 두레상에 오르던 무밥, 호박범벅, 콩죽 따위를 지도에 그리듯 마음에 새겼다. 고샅길로 연결된 놀이터에서 일어난 일이며 계절별로 먹었던 먹거리를 조금씩 수정하기 몇 차례였다. 그래서 정확할 거라 믿었지만 가족이나 친구들과 맞춰보면 엉뚱한 것도 있었다. 순전히 나를 위한 나만의 맞춤형 여행지도일 뿐이었다.
지도에 점으로 남은 것들은 지나온 시간을 연결하는 징검돌이다. 돌 주변은 희미해진 사건과 감정의 덩어리들이 부유한다. 언저리를 배회하는 흔적들을 잡아채서 얼기설기 엮으면 풍성한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더러는 징검돌 사이를 연결하지 못해 끙끙대기도 하고 여기저기 전화질을 해서 기억을 이어보기도 한다. 담담히 시작된 순례길은 포구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멈추는 횟수가 늘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제자리걸음이었다. 누구나 가끔은 아궁이에 불씨를 뒤적이듯 추억 한자락을 곱씹는 날이 있다. 그뿐이다 답을 내리기에는 시원찮았다. 그 자리를 맴돌 때마다 무지근한 명치를 눌러야 했다. 기어코 포구를 먹어야만 몸살이 나을 것 같았다.
자주 시장을 기웃거렸다. 난전에는 갖가지 채소와 가을을 담은 과일이 소쿠리에 올라앉아 손님을 부른다. 발소리 엇갈려 지나는 틈틈이 흥정하는 소리도 끼어든다. 나는 구석구석 바삐 눈을 굴렸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사람들에 휩쓸려 간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감을 소쿠리에 소복이 쌓아놓고 팔고 있는 펑퍼짐한 곡선의 뒷태를 본 순간이었다.
포구, 나를 붙잡은 정체가 그이였구나! 나에게 포구의 맛을 알게 하고 포구를 팔던 야무진 장사꾼이자 내가 간절히 살 부비며 온기를 나누고 싶은 여인이다. 어떤 어려움도 끄떡없이 펄떡이는 심장으로 삶의 행로를 걸었으며 매 순간 최선을 다했다. 부족한 형편이지만 오남매 넘치는 사랑으로 키워 준 사람, 내 그리움의 여정에 언제나 불을 켜는 어머니.
그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수년째 병상에서 눈으로만 세상사를 읽으려 애를 쓴다. 뻐끔한 눈을 마주할 때마다 마음이 무너졌다. 포구의 붉은 물이 추억으로 가는 문을 열길 바란 모양이다. 젊었던 날을 기억하며 스스로가 잘 살아냈다 인정할 수 있기를. 포구즙같은 비가 눈앞을 가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