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안진
(….)
불을 끄고 눈마저 감아야
대낮에 잃은 길도 찾아낼 수 있다지
기나긴 깜깜 어둠 깊고 깊은 캄캄 밑바닥에서
나만이 나의 길인 것을
나만이 나의 미래인 것을
어둠만이 촛불을 꽃피울 수 있다는 것을
찾은 길을 잃지 않으려면
여름도 겨울보다 추워야 한다는 것을
눈발이 그쳤다
밤중도 늙으면 새벽이 되지만
만년을 늙어도 터럭 한 올 휠 수 없다
섣달 그믐밤 언 가지를 체온으로 녹이는 도래까마귀
목청 한 번 떨치면 반경 600리까지 몸서리치는 고독
영험과 고독과 숭고함의 길을 가는 사제로서 전령사로서
밤과 겨울의 검은 치마 시인으로서
선사 이래 백설보다 순결한 검은 세계를 살며.
이 시에 따르면 시인은 자신의 어두운 내면을 자신이 살아갈 삶의 장소로 선택하고 내면의 비밀을 까마귀처럼 투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유안진 시인은 이러한 시인의 형상을 구체적으로 ‘도래까마귀’에서 찾아내면서, 그 이미지를 “영험과 고독과 숭고함의 길을 가는 사제”라는 이미지로 승화시킨다. 그럼으로써 시인의 길은 “백설보다 순결한 검은 세계를” 사는 길이라는 역설적인 진실을 표명한다. <이성혁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