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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의 길

등록일 2021-08-16 19:50 게재일 2021-08-17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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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안진

(….)

 

불을 끄고 눈마저 감아야

대낮에 잃은 길도 찾아낼 수 있다지

기나긴 깜깜 어둠 깊고 깊은 캄캄 밑바닥에서

나만이 나의 길인 것을

나만이 나의 미래인 것을

어둠만이 촛불을 꽃피울 수 있다는 것을

찾은 길을 잃지 않으려면

여름도 겨울보다 추워야 한다는 것을

 

눈발이 그쳤다

밤중도 늙으면 새벽이 되지만

만년을 늙어도 터럭 한 올 휠 수 없다

섣달 그믐밤 언 가지를 체온으로 녹이는 도래까마귀

목청 한 번 떨치면 반경 600리까지 몸서리치는 고독

영험과 고독과 숭고함의 길을 가는 사제로서 전령사로서

밤과 겨울의 검은 치마 시인으로서

선사 이래 백설보다 순결한 검은 세계를 살며.

 

이 시에 따르면 시인은 자신의 어두운 내면을 자신이 살아갈 삶의 장소로 선택하고 내면의 비밀을 까마귀처럼 투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유안진 시인은 이러한 시인의 형상을 구체적으로 ‘도래까마귀’에서 찾아내면서, 그 이미지를 “영험과 고독과 숭고함의 길을 가는 사제”라는 이미지로 승화시킨다. 그럼으로써 시인의 길은 “백설보다 순결한 검은 세계를” 사는 길이라는 역설적인 진실을 표명한다. <이성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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