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무산
저건 가기만 한다
오는 것은 알 수 없고
가는 것만 보이는 건
그건 분명 이상한 일이지만
숙명인 양 가는 뒷모습만 전부다
도무지 얼굴을 볼 수가 없다
우리는 열차의 맨 뒤 칸에서 뒤를 보고 있다
마치 기계노동의 습관처럼
도무지 누가 앞에서 운전을 하는지 알지 못한 채
얼굴이 있는지도 모른 채 우린
모든 걸 배웅하기에 바쁘다
(중략)
순환의 절반을 버림으로써 얻은
이 엄청난 질주와 쾌락
우리는 어떤 재생에도 참여하지 않는다
숙명을 발견하지 않고 발명했을 뿐이다
숙명이라는 쏟아지는 별들의 시간을
‘시계-시간’은 글자판을 순환하지만 앞으로만 나가면서 순환한다. ‘시계-시간’은 삶을 재생하지 않고 소진케 한다. ‘시계-시간’을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은 이 시간을 누가 운전하는지 모른 채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백무산 시인에 따르면 우리는 이 숙명을 “발견하지 않고 발명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숙명은 변화시킬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시의 마지막 부분은 이러한 질문을 유발한다.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