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우가 만났다<br/>이점찬 대구미술협회 회장
문화가 미래의 자산이고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라고 한다. 문화와 예술의 가치를 이야기하면서도 막상 부딪치면 늘 경제나 정치의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던 것이 현실이었다. 그런 지금까지의 통념을 깨부수는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이건희 미술관이다. 이점찬(61·경일대교수·도예가) 대구미술협회장을 만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대담은 대구시가지가 환히 내려다보이는 수성호텔 신관 11층에서 코로나19 방역대책 준수 아래 이뤄졌다.
지금 대구 경북의 현안 중 하나는 이건희 미술관 유치다. 우리 지역뿐 아니라 대한민국을 통틀어서도 그렇다. 삼성 일가에서 고 이건희 회장의 컬렉션을 기증하자 문재인 대통령이 별도의 특별 전시실을 마련하라는 지시를 내리면서 수면위로 떠올랐다.
이점찬 대구미협 회장은 “언제 미술관 문제가 이렇게 국민적 관심을 받은 적이 있었더냐?”고 되묻는다. “이건희 미술관의 등장은 돈 주고도 광고할 수 없었던 문화의 중요성과 의미를 국민들에게 깨우칠 기회를 줬다. 컬렉션의 기증보다 더 큰 선물을 국민들에게 준 것이다.”
대구서 성장한 ‘삼성’ 지역민 애정 돈독
민간단체까지 합세한 유치 의지 남달라
인구 100만명 당 문화기반시설 36.5
17개 광역시 중 16위로 열악한 인프라
지역문화 분권 실현 등 당위성 넘쳐나
2024년 문 열 간송미술관은 ‘고대미술’
운영중인 대구미술관은 ‘현대미술’ 담당
1920년~현대 이르는 ‘근대미술’ 아우를
미술관 유치는 지역예술계 숙명 아닐까
이건희 미술관 건립 이슈는 대구에 기회
-전국의 20개도 넘는 지역에서 이건희 미술관을 유치하겠다고 나섰다. 저마다 나름의 명분을 내세우고 있다. 대구시는 대구에 이건희 미술관이 들어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명분과 당위성은 무엇인가. 대구가 경쟁력에서 자신 있나?
△물론이다. 대구가 이건희 미술관을 유치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차고도 넘친다. 무엇보다 삼성의 연고지가 대구다. 천하가 다 아는 이야기다. 삼성은 대구에서 태어나서 성장했다. 이건희 컬렉션 기증자의 뜻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대구시민의 삼성에 대한 애정도 다른 도시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리고 대구의 미술에 대한 열정이나 기여도 면에서도 다른 도시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특히 근대미술 분야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번 이건희 미술관의 등장은 대구시로 봐서는 기회이고 개인적으로도 절묘한 타이밍이라 생각한다.
-타이밍이라니, 무슨 이야기냐?
△3년 전 미협회장에 출마하면서 근대미술관 유치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이건희 미술관지역이 이슈가 되기도 전인 최근 대구시와는 합의를 거쳤고 국립미술관 공론화 준비 과정에서 이건희 미술관이 등장한 것이다. 이건희 미술관이 유치되면 대구근대미술관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미술관은 대구미술계의 숙제이자 개인적인 꿈이고 목표이다.
-이건희 미술관이 대구에 들어서면 그런 공약과 꿈이 실현되는가.
△대구 전체를 야외 미술관으로 만들고 싶었다. 현재 운영 중인 대구미술관과 올 가을 건립에 들어가는 간송미술관에다 근대미술관을 잇는 트라이앵글을 구상했다. 여기에다 김광석거리와 대구 근대골목들을 잇는 아트 로드(Art Road)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것이 이건희 미술관을 유치하면 지역이 더 확장되지만 대구의 야외 미술관화에는 한 걸음 다가서게 된다.
-대구의 근현대 미술이 대한민국 미술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어느 정도인가.
△대구는 우리나라 근대미술의 산실이자 메카다. 민족시인 이상화의 형 이상정과 이여성을 시작으로 이인성 이쾌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수많은 미술가들이 대구에서 태어났고 대구를 중심으로 활약했다. 고대 시서화(詩書畵)와 현대를 잇는 한국 근대미술에서 대구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런 맥이 지금의 국내외 미술계 현실이다. 대구미협이 근대미술 대표작가 작품전을 계속해오고 있는 것도 그런 흐름이다. 협회는 오는 7월 근대미술조망전으로 지역 원로 작가 전선택 선생의 100수 기념전을 준비하고 있다.
대한민국을 세계 10위권으로 올려놓은 힘이 교육에 있다면 미술교육도 그런 바로미터 중 하나다. 대구지역은 서울 다음으로 미술대학이 많고 한 해 1천500명의 졸업생이 배출된다. 대구미협 회원만도 2천700명이다.
-이건희 미술관이 대구근대미술관과 어떻게 연결되나?
△현재 대구에 있는 국립미술관은 현대미술을, 2024년 개관을 목표로 건립되는 간송미술관은 고대미술품을 전문으로 취급하게 된다. 그래서 1920년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작품을 전시할 근대미술관이 필요한 것이다. 이번에 삼성이 기증한 2만3천여 점의 미술품 가운데 한국 작가의 작품은 근현대 작품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국립미술관에 기증한 컬렉션 중 근대작가의 작품이 절반을 넘어섰다. 이건희 미술관이 대구에 온다면 기존 미술관에 시너지 효과를 더해줄 것이다.
-그런 것이 모두 대구 중심의 이야기 아닌가. 다른 도시들도 모두 나름의 명분을 가지고 있다. 특히 황희 문화체육부 장관의 이야기는 특정지역으로 결정될 우려도 배제할 수 없는 명분 만들기 인상이 짙다. 묘한 분위기다. 냉정하게 우리 주장을 좀 더 객관화할 필요는 없나.
△그렇지 않다. 이건희 미술관 문제라면 대구는 준비된 도시다. 그리고 열심히 움직이고 있다. 대구시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권영진 대구시장은 산격동 옛 경북도청 부지에 2천500억 원을 들여 미술관을 짓겠다고 했다. 부지 사용권한을 가진 문체부에서 허가만 해준다면, 이철우 경북도지사도 적극 협조해 주기로 했다. 유치를 준비하던 경주시도 대구시 유치에 힘을 보태기로 했다. 대구시는 합리적이고 구체적인 제안서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시민단체도 이건희 미술관 유치에 힘을 보태고 있다. 대구미협과 대구관광협회, 유대구운동이 중심이 된 미술관유치시민추진단에 대구상공회의소 등 8개 단체가 참여하고 있다. 이젠 서문시장 상인들까지 미술관이 유치돼야 한다는 데 공감하더라. 민간단체가 주도하는 성금 모금과 서명운동도 보폭을 넓혀가고 있다. 또 다른 정치적인 물밑 움직임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지역출신 국회의원을 중심으로 다방면에서 다각도로 접촉할 것이다.
-그래도 지금까지 정부의 행태를 보면 장담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유치를 위한 심의위원회를 구성해도 위원 선정부터 위원회 구성까지 절차가 공정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긴 가덕도신공항 결정 사례를 보면 장담할 수 없긴 하다. 대구경북통합신공항 유치를 위해 동분서주했는데 가덕도 공항을 결정하니 힘이 빠지더라. 수많은 논리와 객관적 자료를 제쳐두고 합리적 절차 대신 정치적으로 결정하면 방법이 없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면 플랜B를 준비해야 하지 않겠나. 문화와 미술관의 중요성만큼이나 우리 시민들의 의식각성이 중요하다. 지역분권이니 국가 균형발전 측면에서도 지방을 이야기하는데 문화인프라가 열악한 대구가 상대적으로 유리한 면도 있다.
△대구를 문화도시라 했고 대구 시민의 문화 수준은 전국평균을 웃돈다는 통계도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문화 인프라는 너무 뒤처져 있다. 박물관과 미술관을 외형으로만 평가할 수는 없지만 대구의 실태는 다른 광역시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너무 빈약하다. 대구시에는 현재 4개의 미술관이 있는데 문체부의 2020전국문화기반시설총람에 따르면 대구의 인구 100만 명당 문화기반시설은 36.5로 17개 전국 광역시 중 16위다.
문재인 대통령의 ‘문화비전 2030’에는 지역문화 분권 실현과 다양한 지방 문화 보호라는 의제가 포함돼 있다. 수도권에 집중된 문화 인프라를 지역으로 분산시켜 지역민에게도 문화예술 향유의 기회를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정작 계획만 그렇게 세웠지 현실적인 실천은 없었다. 그런 면에서 이건희 미술관은 대구에 위치하는 것이 더욱 당연하다.
관광객보다 지역민에 어떻게 돌려줄 것인가가 중요
-흔히 빌바오 효과를 들먹인다. 문체부장관도 그러면서 수도권 어쩌고 했다.
△제대로 알고 이야기해야 한다. 빌바오는 마드리드에서 400km나 떨어져 있다. 2017년 내가 갔을 때 인구 37만 명의 빌바오에 연 150만 명의 관광객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빌바오가 구겐하임 미술관을 결정할 때는 외국 관광객보다 지역민을 우선으로 꼽았다. 빌바오시의 30개 단체 800여 회원들이 지역민에게 어떻게 문화 혜택을 돌려줄 것인가를 끊임없이 토론하고 고민했다.
-유럽은 사실상 한 나라다. 관광객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닌가.
△유럽은 어디를 중심으로 컴퍼스를 들이대도 반경 2시간 거리에서 2천만 명의 관광객 인프라를 갖고 있다. 그러나 빌바오는 관광객보다 지역민을 우선으로 구겐하임을 건설했다. 1천500억원을 들여 미술관을 짓고 1조원을 들여 네르비온강을 살려냈다. 이것이 빌바오가 성공한 이유다. 전국의 수많은 지방자치단체 공무원들이 빌바오에 출장 가서 현장을 보고 왔다.
그러나 무엇을 보고 자기 지역에서 어떻게 적용했는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랭크 게리의 미술관 건축이나 디자인 같은 외형만 보고 온 것은 아닌가. 지역민보다 실체도 없는 일회성 관광객 수만 부풀리는 허세 프로젝트가 관광산업을 어렵게 만든다. 빌바오의 실체를 얼마나 살펴보고 확인했는지는 아직 국내에서 그런 효과를 내는 지자체가 없으니 알 길이 없다.
-대구에 이건희 미술관이 유치되고 또 성공적으로 건설되기까지 시민 전체의 콘센서스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인가.
△문화는 시간이 필요하다. 대구시가 현안이 있을 때마다 원탁회의를 만들어 시민 의견을 수렴하려는 것도 좋은 시도 같다. 시민과 시청과 시의회의 문화 마인드가 도시의 품격과 성공적인 문화 인프라를 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이경우 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