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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읍성의 文士들

등록일 2021-06-14 18:57 게재일 2021-06-15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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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뻐꾸기 울음소리 이슬비에 젖어 드는 장기읍성을 거닐었다. 산딸기가 탐스럽게 익어가고 밤꽃향이 그윽하게 피어나는 산성 둘레는 청록일색의 싱그러운 파노라마였다. 멀리 보이는 현내 들판에는 판서(板書)하듯이 온갖 작물들이 자라고 있고, 동악산 자락 대숲에는 산성을 호위하듯 창 같은 죽순들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엷은 안개의 마중 속에 주변으로 천천히 눈길을 돌리면서 마름모꼴 읍성의 내력을 생각하며 옮기는 발걸음이 느긋하기만 했다. 포항문인협회 주관의 2021년 포항문학 하계세미나로 열린 ‘제35회 보리 문학제’에 동참한 것이다. ‘보리누름 문학제’는 지난 1986년 고 손춘익 아동문학가를 비롯한 지역 문인들이 대보 구만리 보리밭으로 떠났던 소풍에서 비롯됐다. ‘동해산문’에 실린 한흑구의 명수필 ‘보리’의 문학성을 기리며, 보리가 누렇게 익어가는 때 지역의 문인들이 회동하여 탁주 한사발에 글을 논하고 시를 읊조리던 것이 현재는 ‘보리 문학제’로 이어져 문인과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특색있는 문학행사로 자리매김했다.

문학의 자취를 둘러보며 시민과 문인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개성있는 예술적 감각과 문학적인 소양을 키우는 취지로 올해 35회째 맞이한 보리 문학제는 지난 12일 ‘벼랑 끝에서 길을 찾다’는 테마로 장기읍성과 장기유배문화체험촌 일원에서 열렸다. 첩첩산중, 바다에 둘러싸인 장기면은 예부터 사대부 유배지로 조선왕조 500년 동안 단일 현에서 가장 많이 정배된 곳이지만, 당시의 석학이나 정객들이 형벌의 땅에 머물면서 학문연구와 문풍이 되살아난 대표적인 곳이기도 하다.

‘녹음은/서슬 푸른 정배(定配) 마냥 에워싸도/보리물결 의연히 원숙으로 익어가는/변방의 적거지(謫居址)에는/이끼 새삼 푸른데//혹독함이 키운 뿌리 튼실함을 더해가고/비운의 귀양살이 충정 외려 드높아/정념(情念)의 웅숭깊음이/초연하게 자라네//처연함에도/문기와 인지(人智)가 솟아/우암(尤菴)이 어리고 다산(茶山)이 배인 둘레/맥추(麥秋)의 바람결 따라/학덕이 넘실대네-拙시조 ‘장기유배지 소견’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이 장기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펼친 강학과 남긴 시문들은 학문을 숭상하는 문화적인 풍토가 됐다. 외지고 궁벽한 귀양지에서 유배의 좌절을 서책 탐구와 저서 집필, 유생 교육 등의 새로운 학풍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지역의 소객(騷客)들이 1.4km 정도의 성곽을 둘러보고 녹음 속의 ‘우암과 다산의 사색의 길’을 걸으면서, 문필의 현대적인 계승과 문학의 새로운 지향점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했다. 사회적인 양상과 시대를 반영하는 문학은, 코로나의 고역에 시달리는 국민들에게 과연 어떤 위로와 희망을 전하고 문사(文士)로서의 역할을 다해야 하는 걸까?

돌아오는 길, 신창리 해변의 몽환적인 해무 속에서 몇 편의 자작시와 수필을 낭독하고 경청하는 내내 파도도 흥겨운지 철썩대는 음률로 추임새를 넣고 있었다. 문학지망생인 포항문예아카데미 23기 수강생들도 그렇게 함께 어울리고 나눈 시간들이 정겹고 넉넉하게 맥랑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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