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31일 중국 우한에서 정체불명의 폐렴 환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이 세계보건기구(WHO)에 보도되면서 전 세계에 알려졌다. 그리고 2019년에 발생한 왕관처럼 생긴 바이러스이기에 코로나19(COVID-19)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때만 해도 코로나19가 온 지구를 휩쓸 팬데믹이 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 모두는 마스크를 쓰고 있고, 코로나19는 현재까지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또 변종바이러스로 인해 어느 시점까지 진행될지 알 수도 없다.
코로나19 발생의 원인에 대해 말이 많기도 했었지만, 이제 정설(定設)로 자리 잡은 것은 수산물을 판매하던 중국 우한의 화난수산시장의 야생동물들로부터 발생했다는 설이다. 중국정부는 우한이 코로나19의 발원지라는 의혹을 부인하고 있지만 말이다.
전염병의 세계사에서 6세기 콘스탄티노플 비잔티움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1세 때의 전염병은 전 세계 인구의 절반인 5천만여명을 죽음으로 몰았다고 전해진다. 14세기 유럽의 페스트는 유럽인구의 3분의 1을 사망하게 하였다. 또 천연두는 1796년 세계 최초로 백신을 개발하였음에도 20세기에만 3억여명이 죽었다. 1차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경에는 스페인 독감으로 지구상에서 약 1억명이 사망했다. 이 사망 숫자는 당시의 1차세계대전에서 사망한 군인의 수보다 휠씬 더 많다.
전염병이 어디에서 오는지? 빅히스토리에서는 인간이 수렵채집사회에서 농경사회로 발전해가면서 짐승을 집에서 기르게 되었고, 이때 가축으로부터 건너온 인수공통감염병이 인간으로 전이 되어 왔다고 보고 있다.
신대륙 발견의 사실(史實)을 보면, 인간에 의한 감염도 끔찍하다. 스페인 군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들어가 아즈텍문명을 무너지게 한 것은 군대가 아니라 군인들이 퍼트린 천연두이다. 전혀 새로운 세균, 바이러스를 만났을 때는 인간종(人間種)이 완전히 괴멸할 수도 있다는 역사적 증거인 셈이다.
그리고 현대에서는 인간의 자연개발과 환경파괴로 인해, 인간이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바이러스가 퍼지기 시작한다. 브라질,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등의 밀림을 개발하게 되고 밀림에 있던 야생동물인 박쥐로부터 새로운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넘어온다는 것이다. 에볼라도, 사스(SARS)도, 코로나19도 인간의 자연 파괴에서 발생하였다. 여기에서 인류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철학과 목표를 세우지 않을 수 없다.
강한 놈만 살아남는 적자생존, 승자독식, 비양심, 비인간성, 무분별한 자연훼손 등을 극복할 수 있는 생명에 대한 외경, 자연에 대한 존중, 생태적 자연관 등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고 공유하는 휴머니즘적 생태주의 가치를 되돌아봐야 한다.
1992년,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유엔환경개발회의가 열렸다. 그 회의의 결과로 지구의 환경을 보전하기 위하여 ‘세계 각국의 정부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하여야 한다.’는 명제를 기본원칙으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각 지방자치단체에 ‘지방의제21’라는 단체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지방의제21은 리우데자네이루 회의의 결과물이다. 거버넌스(협치)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고 시민사회와 지방정부가 환경문제에 대해 협의하는 문화가 생겼다. 이는 지역사회를 녹색환경사회를 목표로 변화시켜 나가자는 취지에서 보면 의미가 크다.
그리고 리우데자네이루 회의에서 합의한 ‘지속가능한 발전’의 개념은 미래 세대에게 필요한 환경과 자원들을 충족시킬 능력을 저해하지 않으면서 현세대의 필요를 충족시킨다는 의미를 말한다. 환경보전과 경제성장이 후세대까지 지속되도록 지향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산업혁명이후 인류는 탄소, 즉 석탄과 석유없이는 산업활동을 유지할 수 없었다. 농업생산력 증가로 인해 인구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였고, 지구의 일부분이었던 인류로 인해 지구가 무분별하게 파헤쳐졌다. 산업활동을 정지하거나 제어하지 않으면 인간은 지구를 막다른 절벽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코로나19의 발생원인이, 돈이 된다면 지구 끝까지 개발해나가는 황금만능주의적 자본주의, 열대우림의 남벌, 야생동물에 대한 침해, 툰드라 냉대지대의 해빙으로 나타난 신종바이러스에 기인한다면, 코로나19바이러스는 언제나 인간에게 노출되어 있고 일상적으로 팬데믹을 일으키게 된다. 지금의 마스크를 벗어 던질 수가 없다. 이게 사람의 삶인가? 그 즐겁던 소풍도, 아이들의 웃음도, 노인들의 고즈넉한 산책도 디스토피아가 되는 것이다.
지속가능한 사회가 아니라, 무한경쟁으로 인해 인류가 망해 가고 있는 내일을 다시 한번 더 생각해보자. 이산화탄소와 메탄가스로 인해 지구는 뜨거워져 가고, 그로 인한 기후변화가 우리의 아이들, 가족들의 아름다운 삶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서로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의 삶에 대해 공감하고, 경쟁보다는 공존공영, 나눌 줄 아는 삶이 얼마나 즐거운 삶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