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성추행으로 사퇴한 정당 대표의 지역구민들과 참담한 심정으로 대화하던 중 왜 그랬을까 질문했다가 오해를 받았다. 가해자에게 왜 그랬느냐고 묻는 것은 가해자를 변호하는 태도라는 것이다. 그 말을 들으니 몇 년 전 읽은 칼럼이 생각났다. ‘악인에게 맞서지 말라’는 제목의 그 칼럼은 2011년에 나온 영화 ‘케빈에 대하여’를 다루고 있다. 케빈은 화살로 아버지와 여동생을 죽이고 학교에 가서 친구들을 체육관에 가두고 화살을 쏘아 죽였다.
시간이 지난 후 케빈의 엄마는 감옥에 있는 케빈에게 왜 그랬느냐고 묻는다. 그 칼럼에서는 이런 질문이 피해자를 영원히 피해자로 남게 한다면서 왜 그랬느냐고 묻지 말라고 한다. 악의 이유를 질문하는 것은 피해자의 자아존중감을 파괴하는 진짜 악이란다. 이유를 밝히면 잠시 피해자의 상처가 줄어들 수는 있지만, 그 이유는 대단히 복합적이기도 하고 오히려 가해자의 책임을 줄여줄 수도 있으며, 왜 하필 나지? 하는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유가 복합적이라고 해서 이유를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니고, 이유를 밝힌다고 해서 피해자의 자아존중감이 파괴되는 것은 아니다. 이유를 밝히는 것은 또 다른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기 위한 노력이다.
1999년 미국 콜롬바인 고등학교 졸업반 학생 에릭과 딜런은 선생님 한 명과 학생 12명을 살해하고 24명에게 부상을 입힌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6년 후 딜런의 엄마 수 클리볼드는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라는 책을 쓴다. 딜런이 왜 그랬는지 알기 위해 고군분투한 기록이다.
자식들에게 무슨 문제가 생기면 쉽게 부모 탓을 한다. 그러나 어떤 일이 일어나는 원인은 너무나 많고 복합적이어서 우리의 이성으로 정확하게 다 알아내기는 불가능하다. 알아낸다고 해도 그것이 충분한 이유라고 볼 수도 없다. 케빈의 엄마가 아이의 울음소리를 감당하기 어려워 시끄러운 공사장에 데리고 갔다고 해서 케빈의 행동을 설명할 수는 없다. 한두 가지로 원인을 밝히는 방식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딜런의 엄마도 딜런이 왜 그랬는지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래도 그 과정에서 부모가 아이의 변화를 눈치챘다면 막을 수도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부모는 딜런이 자살 충동을 느낄 만큼 우울증이 있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우울증이 그 사건의 원인도 아니다. 우울증에 부모의 책임이 얼마나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얽혀서 일어났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지만, 그 모든 이유를 합쳐도 그 일이 반드시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 조건 중 하나만 없었어도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은 있다.
왜 그랬느냐고 묻는 것은 결코 가해자를 변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유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또 다른 가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예방하는 방법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해자를 악마라고 규정하는 것은 쉽지만,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딜런의 엄마는 자녀의 변화를 세심하게 관찰하는 방법을 발견했고 강의를 하면서 많은 부모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