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부터 내린 비는 이 저녁 유리창에 이슬만 뿌려 놓고서 밤이 되면 더욱 커지는 시계 소리처럼 내 마음을 흔들고 있네”
햇빛촌이 부른 ‘유리창엔 비’ 노랫말이다. 창밖엔 비가 내리면 메마른 마음도 이런저런 상념에 촉촉이 젖는다. 그것은 그리움이기도 하다가 외로움이기도 하다가 근원을 알 수 없는 서러움이기도 하다. 그 눈물은 눈가에 이슬처럼 방울 맺히고 보슬비처럼 보슬보슬 젖고 장대비처럼 주르르 흘러내리기도 한다.
·가랑비-가늘게 내리는 비. 이슬비보다 더 굵다.
·개부심-장마로 홍수가 난 후에 한동안 멎었다가 다시 내려, 진흙을 씻어내는 비.
·는개-안개비보다는 조금 굵고 이슬비보다는 가는 비.
·도둑비-밤에 몰래 살짝 내린 비.
·먼지잼-먼지가 일지 않을 정도로 아주 조금 내리는 비.
·발비-빗발이 발처럼 보이도록 굵게 내리는 비.
·보슬비-바람이 없을 때 작은 알갱이로 보슬보슬 내리는 비.
·부슬비-보슬비 알갱이보다 조금 굵은 비.
·산돌림-이 산 저 골짜기로 돌아다니면서 한 줄기씩 내리는 소나기.
·싸락비-싸래기처럼 포슬포슬 내리는 비.
·실비-실처럼 가늘게, 길게 금을 그으며 내리는 비.
·소낙비-갑자기 세차게 쏟아지다가 이내 그치는 비(소나기).
·색시비-수줍은 새색시처럼 소리 없이 내리는 비.
·안개비-눈에 보이지 않게 내리는 비.
·여우비-맑은 날에 잠깐 뿌리는 비.
·웃비-좍좍 내리다가 잠시 그쳤으나 다시 내리는 비.
·이슬비-는개보다 굵고 가랑비보다 가늘게 내리는 비.
·작달비-굵고 세차게 퍼붓는 비.
·자드락비-굵고 거칠게 내리는 비.
·장대비-빗줄기가 굵은 장대처럼 쏟아지는 비.
·진눈깨비-눈도 비도 아닌, 눈과 비가 뒤섞인 비.
·채찍비-채찍으로 후려치듯 굵고 세차게 내리는 비.
비는 때에 따라 나름의 이름이 있다. 음력 보름 무렵에 내리는 비는 보름치며 음력 그믐께 내리는 비는 그믐치다. 견우직녀가 만나는 칠월칠석에 내리는 비는 칠석물이며 양이 모종하기에 알맞도록 내리는 비는 모종비이다. 모내기할 무렵에 한목 오는 비는 목비며 뜨거운 복날 전후에 시원하게 내리는 비는 복비다. 농사를 짓도록 적합하게 내리는 비는 꿀비며 필요할 때를 맞추어 알맞게 내리는 비는 단비요, 약처럼 요긴할 때 내리는 비는 약비다.
그런가 하면 어떠한 행위를 부르는 비도 있다. 할 일 많은 봄에 내리는 비는 일을 부르므로 일비라고 한다. 바쁜 일이 없는 여름에는 비가 오면 낮잠을 자기 좋으므로 잠비라고 한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비가 오면 떡을 해 먹으면서 여유 있게 쉰다고 떡비라고 한다. 농한기인 겨울에 내리는 비는 술 마시며 놀기 좋다고 술비라고 부른다. 비의 이름에 삶의 정취가 고스란히 녹아있지 않은가.
우리네 조상은 일상을 비에 맞추었다. 잔비, 흙비, 해비, 가루비, 누리비, 봄장마, 장맛비, 달구비, 궂은비, 마른비, 비보라, 바람비, 우레비, 가을비, 겨울비, 건들장마, 억수장마, 모다깃비, 무더기비, 비에 따라 일을 하거나 집에서 쉬었다.
농경문화에서 비는 곧 하늘의 말씀이었다. 천둥, 번개와 함께 비를 퍼부으면 하늘이 노했다고 믿었고 오래도록 하늘이 외면한다고 여겼다. 가뭄을 끝내는 비에 웃고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홍수가 나면 울었다. 다 마른 빨래를 적시는 소낙비를 원망하고 더위를 식히는 소나기에 고마워했다. 사람을 울리고 웃기는 존재인 비, 그래서 <정선아리랑>에는 목놓아 울고 싶은 마음을 이렇게 읊었다.
“비가 올라나 눈이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우리네 가요에는 비가 많이 내린다. 새벽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안개비가 소리 없이 마음을 적신다. 그대는 봄비를 무척 좋아하는지 다정하게 묻고 이 빗속을 둘이서 말 없이 걸어보자고 청한다. 비라도 내리면 금방 울어 버리겠네 라고 울먹이고 가랑비야 내 얼굴을 세차게 때려달라고 읍소한다. 이별 뒤 슬픔을 이기지 못해 찬비야 내려라 밤을 새워 내려라고 절창한다.
요즘은 비에 대한 서정이 옛날 같지 않다. 비가 삶을 좌우하는 시절이 아니므로 일상에서 비에 울고 웃을 일이 별로 없다. 그래선지 무엇에 젖는 문화보다 무엇을 즐기는 문화가 성행한다. TV는 먹고 놀고 즐기고 춤추는 예능 프로그램이 점령한 지 오래다. 생각하고 사색하는 프로그램이 몇 있지만, 그 분량이 적어 안타깝기도 하다.
어느새 버들가지에 연둣빛 봄물이 파릇하다. 봄비 내리면 우산을 들고 들녘에 나가봄직도 하다. 차박차박 빗방울이 대지를 두드리는 소리를 가만히 들어보고, 발끝으로 고인 물 찰박찰박 차며 걸어도 보고, 그렇게 젖다 보면 무엇에 젖는다는 것의 의미를 느낄 수 있을 터이니.
/수필가·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