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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지도 만들기

등록일 2020-12-21 18:49 게재일 2020-12-22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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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희<br>인문글쓰기 강사·작가<br>
유영희인문글쓰기 강사·작가

날씨는 차지만 산책 겸 30분을 걸어서 작은 서점에 갔다. 책이 많지 않다며 민망해하는 주인에게 책이 많으면 고르기 힘들다고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네고 서가를 둘러 보다 반가운 책을 발견했다. 사진 작가 호시노 미치오의 수필집 ‘여행하는 나무’이다. 이 작가의 ‘또 하나의 시간을 간직한 삶’이라는 짧은 글에 알래스카 고래 이야기가 아주 감동적으로 묘사되어 있어서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44년이라는 짧은 삶의 후반기 20여 년을 알래스카에 거주하면서 그곳의 자연과 야생동물과 사람들을 사진에 담았다고 한다. 어떻게 알래스카를 선택했을까 궁금했는데, 서문에 그의 인생 철학을 알 수 있는 의미 있는 내용이 있다.

북극권에서는 자라지 않는 등피나무를 북극해에서 발견하고 작가는 그 나무가 자기만의 여행을 했다고 생각한다. 하늘을 향해 뻗어오르던 등피나무가 껍질이 다 벗겨지고 뿌리마저 흉물스럽게 드러난 채 북극까지 떠 내려와서는 작은 티티새에게는 휴식을 주고 북극여우에게는 영역을 표시하는 소중한 공간이 되었음을 발견한다. 작가 역시 알래스카에서 15년간 생활하면서 자신만의 알래스카 지도를 그릴 수 있게 되었다면서 사람도 나무처럼 자신의 지도를 그리며 여행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자신의 지도 그리기는 우연히 찾아오기도 한다. 어느 교수는 터어키의 테키르다 어디에서 학회가 열리는지 몰라 그 작은 도시를 택시 타고 헤매면서 자신만의 테키르다 지도를 그릴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나도 20여 년 전 북경에서 일행과 길이 어긋나 종이 지도 한 장에 의지하여 목적지를 혼자 찾아간 적이 있다. 길가 음식점에 들어가 짜장면도 먹고, 공중 화장실도 필담으로 물어서 가고, 시내버스를 타기도 했다. 마롄따오에서는 크게 바가지 쓰지 않고 역시 필담으로 차와 다기까지 샀다. 그 덕분에 나만의 노선으로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렇다고 자신만의 지도를 그리기 위해 꼭 길을 잃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소한 선택으로도 자신의 지도를 그릴 수 있다. 목적지도 정하지 않고 집을 나왔다가 뜻하지 않게 이 책도 발견하고 이런 글을 쓰게 되었으니 오늘 오후 나만의 지도를 그린 셈이다.

요즘은 대부분 집콕이지만, 여행객이 많은 시절, 낯선 곳에 여행을 가게 되면 미리 검색하여 모든 노선을 완벽하게 짜놓고 떠나는 사람이 많았다. 가보면 모두 한국 사람이다. 다들 그렇게 같은 정보로 같은 노선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런 방법이 안전하기는 하지만, 나의 개성을 발견할 수는 없다.

인생도 그렇게 안전한 코스를 정해 놓고 싶지만, 인생에 그런 코스가 있을 리 없다. 큰애 역시 붙박이 삶을 최고로 생각하지만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석 달 후에 또 출국하여 떠돌이 생활을 이어가게 되었다. 힘들겠지만 자신의 지도 한 부분을 그려나가기를 바랄 뿐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나 역시 나만의 지도 그리기를 두려워하지 말자는 야릇한 의욕이 저 아래 뱃속에서 내장지방을 뚫고 살짝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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