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유학자 박수는 17세에 학문을 시작하여 초기에는 과거에, 후에는 문장공부에 매진하였으나 모두 소용없음을 깨닫고 도학공부를 시작해 35세에 간재 전우의 문하에 들어갔다. 왕조도 기울고 지탱하던 유학의 도(道)도 스러져갔지만 형세가 한창 굽혀지는 시대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민족정신의 고취에 일생을 바친 인물이다.
박수가 스승인 전우에게 올린 편지에서 당시 유명 인사인 홍승헌의 논설에 대해 변론한 내용을 보면, 새로운 사상과 문물이 내리막길 왕조에 물밀듯이 들이닥쳐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이 흔들리고 있다. 향교와 서원의 자리에 일본식 학교와 교회당이 들어서고, 세계열강은 자립, 계몽 등 명분을 내세워 선동하며 조선에서 각축을 벌이고 있다. 지식인들은 흥학(興學)의 구호에 휩쓸리고 공학(孔學)과 공교(孔敎)를 표방하며 자립의 권한을 내세우지만 힘없는 나라의 공허한 울림뿐이다. ‘자립 두 글자는 망국의 장본이다.’ 입만 열면 명분뿐인 구호들만 현란했던 당시 지도층의 상황을 바라본 박수의 근심어린 한마디이다.
누구나 자립은 원한다. 하지만 일찍이 파스칼도 말했듯이 ‘힘없는 정의는 무력할 뿐이다.’ 힘이 없으면 자립을 아무리 외쳐도 의미가 없다는 진실을 박수는 꿰뚫어 본 것이다. 무기력한 조선은 그들이 의도하고 조종하는 대로 국론이 분열되어 위아래가 반목하고 결국 망국의 길을 걷게 되리라는 것도 간파하였다. 아울러 그는 강한 외세에 비해 나약한 조선의 상황을 인식하고, 격동하는 정세에 순응하며 민족의 맥을 유지하고 이어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 바람이 모든 사람에게 전해져 훗날 나라를 회복할 근간이 되기를 소망하였다. 한창 굽혀지고 있는 형세인데 펴려고 한다면 그 형세를 면하지도 못하고 도리어 꺾일 것이다.
그러니 난무하는 위험한 구호에 현혹되지 말고 은인자중하며 나라의 위태로움 속에서도 민족의 정신을 부지해 나갈 것을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권하였다. 이 방법이 소극적인 저항으로 보이지만 목숨을 끊거나, 조국을 떠나 타국에서 저항하던 의혈지사 못지않게 지금의 우리나라를 일구는 원초적 힘이었음을 우리는 그의 국가관에서 읽을 수 있다.
인권, 자주 등을 정의라고 할 수 있으나 그 시행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다. 박수는 때가 중요하니 때를 알지 못하면 아무리 정의를 행하더라도 중도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구호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때와 형세를 아는 것이 중함을 꿰뚫어 본 박수의 통찰력은 지금 시대에 시사하는 바 크다.
광복되고 75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지금, 100여 년 전 시골선비 박수가 살던 시대와 다르지만 위정자들의 궤변이 진실을 묻어 국론을 분열시키고, 정의와 공정, 민주를 앞세워 교묘히 패악을 조장하는 세력도 여전히 활개 친다. 인권이라는 구호 아래 사회악이 필요 이상으로 보호받기도 하고, 자주국방을 내세워 국가안보를 위험에 빠뜨리려는 세력도 여전히 설치고 있다.
이런 불확실한 요인들을 제거할 수 있는 주체는 오로지 국민뿐이다. 국가흥망은 필부유책(國家興亡 匹夫有責)이다. 나라의 흥망은 결국 필부(국민)들에게 그 책임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