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학교로 가는 길은 두 갈래였다. 과수원 사이를 지나는 새길과 논을 옆에 두고 가는 헌길이다. 통학버스가 다니기 위해 새로 만들어 놓은 길은 차 전용이었고, 자전거가 마주와도 한 쪽은 내려서 길가로 비껴서야하는 헌길은 걷는 사람 전용이었다. 두 길 모두 빠른 걸음으로 걸어서 30분이면 학교에 도착했다.
내가 주로 다닌 곳은 헌길이었다. 헌길엔 도랑이 바짝 따라 붙으며 길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물빛에 내 그림자를 비춰가며 개멀구를 따먹고, 산 밑까지 내려오다 냇물을 건너지 못한 칡덩굴이 향긋한 냄새를 풍겨 코를 벌름거리게 했다. 지금도 오래된 길을 좋아한다. 포항에서 출발해 영천에 가는 길은 고속도로와 국도도 있지만 오늘 가 볼 길은 이 두 길이 태어나기 전 이용했던 헌길이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진 길이라 자세히 설명하고 귀담아 들어야 길을 잃지 않고 갈 수 있다. 일단, 연화재를 지나 고속도로 빠지지 말고 청송·기계 방향으로 튼다. 강동면 새마을로를 달려 달성네거리에서 직진신호를 받아 달릴 때쯤 네비게이션은 서포항IC로 차를 올리라고 재촉하겠지만 우린 그냥 지나친다. 봉계리란 이정표가 나오면 고지교라는 다리를 건너기 위해 좌회전 한다. 이제 촌길로 들어선다. 과수원 사잇길로 직진하며 가지에 하얗게 열린 사과꽃을 구경하다보면 운주사, 영천CC라고 조그맣게 써진 이정표가 나온다. 이 길이 아닌가싶게 좁은 길이다. 망설이지 말고 구불길로 들어서라. 길은 굽어지는 동시에 가팔라지니 속도는 저절로 느려져 이제부터는 산이 뭐라 말하는지 들이 무엇을 키우고 있는지 귀에 눈에 넣기 좋아진다.
산 아래 동네에는 지난주에 꽃잎을 다 떨구고 연두 잎을 내기 시작한 벚나무가 윗동네인 산골에는 이제사 연보라 빛으로 수채화를 그리고 있다. 나무들도 따뜻한 기운에 한껏 물을 올리느라 연두연두해지니 입장료도 한 푼 내지 않고 구경하는 우리 마음도 말랑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차의 속도는 더 느려진다. 산을 다 오르면 여기서부터 영천이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이제부터 내리막길이다. 동네가 한 눈에 들어온다. 올봄에 비가 잦아서 저수지에 농사지을 물이 가득한 수성2리를 지나다 보면 마늘밭에 올마늘의 키가 제법 크다. 들에는 밭을 살찌우려는 경운기 소리가 가득하다. 오래전 폐교가 된 수성초등학교에 지금은 아이들 대신 군인들이 숨어서 훈련 중이다. 조금 더 가다보면 강물인가 할 만큼 너른 임고저수지가 보인다. 오늘은 바람이 없어서 연둣빛 봄산이 저수지에 몸을 비춰 매무새를 다듬기 좋다. 저수지 물을 끌어다 복숭아를 키우는 금대리는 봄 내내 분홍 천지라 낚시터 이름도 무릉도원이다. 마을버스가 지나길 잠시 기다렸다 자두밭 배밭을 지나 임고면에 접어든다. 임고면 황강길에 남강 정사가 자리한 연못이 오늘 여행길의 압권이다. 벚꽃이 질 무렵에 이곳에 가면 연못은 하얗게 꽃잎으로 뒤덮인다. 그러다 산들바람이라도 불면 떠다니던 잎들이 연못 한 귀퉁이로 몰려와 하얀 레이스 천을 덮어 놓은듯하다. 꽃은 폈을 때도 곱지만 지고 나서도 여전히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다.
군자는 대로행이라며 다니던 길만 고집하던 내 운전습관을 보더니 친구가 정해진 길로만 다니니 토끼길 운전이라 했다. 그 길이 그 길이면 그날이 그날이라 권태라는 올무에 걸리기 십상이다. 짧은 시간을 길게 늘리는 방법은 다양한 길을 가보는 것이라는 충고에 처녀길도 과감히 나서고, 가던 길도 빙 둘러 가 봤다.
길의 사계절이 보이기 시작했다. 촌길 끝에 임고초등학교가 있다. 가장 아름다운 숲을 가진 학교로 뽑힌 곳으로 운동장 가득 플라타너스가 둘러섰다. 비 오는 아침, 노을 지는 해거름녁, 널따란 플라타너스 잎이 수북이 쌓여 바스락 거리는 늦가을, 언제든 가도 좋은 곳이다. 헌길을 찾아 나서는 이유가 거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