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1987년 6월은 잔인한 달이었다. 청년 학생들의 독재 타도, 호헌 철폐를 외치는 소리는 전국에 울려퍼졌다. 당시 학생 데모가 과열하면 최루탄이 난무하고 대학은 휴교령이 내려지고 문을 굳게 닫아 버렸다. 그해 1월엔 서울대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 사건이 있었다. 당시 `탁 치니 억하고 죽더라`는 말이 유행처럼 회자됐다. 6월 9일 연세대에서는 이한열 군이 최루탄에 맞아 쓰러졌다. 전두환 군부 독재가 4·13 호헌 조치를 통해 공안 통치를 하던 살벌한 시기였다. 당시 서울 도심 100만 명의 민심이 6·29 호헌 철폐 조치를 이끌어 내었다. 많은 민주 투사와 열사의 희생이 따랐다. 이를 우리는 `6월 항쟁`이라 부르고 6월 10일은 그 기념일인 것이다.
세월은 빨라 또 다시 민주항쟁 30주년이 됐다. 2007년 노무현 정부에서 제정한 6·10 민주 항쟁 기념일은 이명박, 박근혜 정부 하에서는 있는둥 마는둥 조용히 치러졌다. 아마 광주의 5·18과 같이 피하고 싶은 국가 기념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권 교체 후 문재인 대통령은 이 행사에 참여해 그 역사적 의의를 되새겼다. 정부가 지난 촛불 혁명을 1987년 6월 항쟁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한 결과이다. 정권에 따라 국가 기념일의 성격이나 행사 규모를 달리하는 것도 우리 정치의 왜곡된 단면이다. 최소한 국가 기념일까지 이데올로기적 잣대로 평가되거나 재단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
6·10 민주 항쟁은 결국 직선제 개헌을 통한 소위 87 체제 구축에 그 역사적 의의가 있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는 통치자의 사망으로 종결됐으나 전두환 정권은 7년 단임이라는 간선 대통령제를 통해 겨우 체제를 유지하려고 했다. 신군부의 집권은 국민 주권주의라는 절차적 정당성을 초반부터 상실했던 것이다. 결국 6·10 민중 항쟁은 제도적, 절차적 민주주의를 수립하기 위한 국민적인 저항운동으로 확산됐다. 그러나 6·10 항쟁은 결국 못다 이룬 `미완의 혁명`으로 남게 되었다. 당시 김대중, 김영삼의 분열은 노태우 정권의 탄생을 도와줬다. 역사는 우리들에게 민주주의가 제도적 틀의 구축만이 아닌 그 실천이 중요함을 다시 한 번 깨우쳐 줬다.
그렇다고 우리는 6월 항쟁을 정치사에서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이제는 어떤 정권이 들어서도 국민 주권주의라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결코 훼손할 수 없기 때문이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우리는 6명의 대통령을 국민의 손에 의해 직접 선출했다. 박 전 대통령의 파면과 문재인 대통령의 선출도 6월 항쟁의 국민주권주의 승리의 산물이다. 이러한 6월 항쟁을 통한 제도적 민주주의의 정착은 정당 간의 실질적인 정권 교체도 가능하게 했다. 이제 한국 민주주의도 정당간의 경쟁을 통한 인간의 존엄성 보장의 기여도로 평가돼야 한다. 이제 진보와 보수라는 이념의 잣대로만 정권을 평가해서는 더욱 안 된다. 6월 항쟁은 정치권력이 독점화 되거나 사유화될 때 국민이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는 진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
민주주의는 결코 과거 완료형이 아닌 현재 진행형이다. 우리는 이제 6월 항쟁의 연장선에서 문재인 새 정부를 맞이하고 있다.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아직도 여러 곳에서 암초에 부딪쳐 있다. 여소야대의 정국 하에서 정치적 절차적 민주주의는 협치(協治)의 어려움을 더해가고 있다. 경제적, 사회적 민주주의는 곳곳에서 아직 정착하지 못하고 있다. 이 나라의 보수와 진보 정권이 그 동안 정책 대결보다는 시대에 뒤진 이념을 방패로 정쟁만 초래한 결과이다. 이 나라 정치는 아직도 참된 보수와 진보의 대결이 아닌 사이비 이념의 노예가 되었다. 이제 문재인 정부가 국민을 위한 진짜 개혁 정치의 모습을 보여줘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