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에는 쥐를 잡기 위해 고양이를 기르지 않는다. 대부분 애완용으로 기르고 있으나 예전 농경사회에서는 고양이를 키우는 목적이 곡식을 훔쳐 먹는 쥐를 잡기 위해 키웠다. 당시 고양이는 쥐를 잡는 기본역할을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사람들로부터 크게 사랑을 받았다. 그 시대를 살았던 우리의 조상들은 자신들의 생활에 큰 이로움을 주는 고양이와 관련된 글을 종종 남겼다.
조선중기 학자 권호문(1532~1587) 선생은 `송암집`, `축묘설`에 이렇게 적고 있다. `대개 짐승의 몸을 하고서도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도 있으며, 사람의 얼굴을 하고서도 짐승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도 있는 법이다. 이 세상에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서도 쥐새끼 같은 짓을 하는 자들이 너무나 많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나라에서 주는 옷을 입고 나라에서 주는 곡식을 먹으면서도 자신의 직분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 자들이여, 어찌 우리 집의 고양이에게 부끄럽지 않겠는가.`
쥐는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을 만큼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동물로 우리의 주위 어느 곳에서나 살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어둠 속에 숨어있기 때문에 우리의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에도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고 쥐의 습성을 닮은 자들이 곳곳에 웅크리고 있으면서 각종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곡식을 훔쳐서 자신들의 소굴로 가져가 사람에게 큰 피해를 주는 쥐를 `석서`라 일컫는다. 석서는 작은 쥐보다 훨씬 더 큰 쥐를 말한다. 이 단어는 본래 시경의 `위풍 석서`에 나오는 시의 제목에서 유래한 말로써 기장을 훔쳐 먹던 큰 쥐를 후대에 권력을 이용해 백성들을 못살게 구는 위정자나 탐욕스러운 공직자나 범죄자를 일컫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특히 공직자가 되어 국가에서 주는 녹봉으로 살면서 고양이의 역할을 해야 할 자들이 백성들에게 폐해를 주는 쥐들을 잡지 않고 되레 그들의 이욕만 취한다면 이들이 바로 석서이며, 선생은 축묘설을 통해 이들을 꾸짖고 있는 것이다.
70년대 유신독재로 암울했던 시대에 김지하 시인은 `오적`이란 시를 발표해 당시의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당시 풍자시의 백미를 장식한 이 시에서 국회의원, 고위공무원, 재벌, 군 장성, 장·차관을 오적으로 지목했으며 이들을 지칭하는 모든 한자에 개견 변을 넣어서 말을 만들었다. 이 시에 나오는 사람들 가운데 공익은 도외시한 채 개인이나 집단의 사리사욕에만 눈이 먼 자들이 바로 현대판 `석서`이며 청산돼야 할 적폐세력인 것이다.
이들은 비교적 사회의 높은 위치에 있어서 그 위세가 대단하고 서로 연줄로 맺어 있어서 그 생존력도 매우 끈질기다. 때문에 힘없는 고양이로는 퇴치가 힘들다. 이들에 맞설 만한 위세를 가진 고양이가 바로 오늘날 권력기관인 검찰인 것이다. 하지만 임명권자로부터 독립되지 못한 검찰은 그 역할이 위축되니 사회는 자연히 석서가 넘쳐나는 세상이 되었다.
쥐를 잡아야할 고양이가 자신의 직무에 태만할 경우 그 순간부터 고양이도 석서로 변해버린다. 정의를 세우고 국민에게서 박수를 받아야 마땅한 기관이 국민에게 해독만 끼치는 석서로 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나라의 기강을 세우기 위해서는 권력으로 포장된 큰 악을 퇴치해야만 사회가 맑아진다. 대선을 앞두고 각 정당의 후보자들은 하나같이 적폐청산을 국민 앞에 공약으로 내놓고 있다. 하지만 석서는 이미 정해진 것이 아니다.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집권한 세력이 국민이 쥐어준 권력을 통해 국가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초심을 잃을 때 그들 또한 석서로 변한다. 청산되어야할 적폐세력의 중심에 있지나 않을지 두고 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