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이 태극기를 태우느냐, 태극기가 촛불을 끄느냐. 이 대결의 무대가 위험한 공공시설처럼 마련돼 있다. 촛불은 태극기를 태울 수 있다. 태극기는 촛불을 끌 수 있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물리적 현상일 뿐이다.
촛불, 태극기. 현재 한국사회에서 두 단어는 정치적 언어, 이념적 언어 그리고 시적(詩的) 언어다. 물리적 언어를 초월해 버렸다.
정치적 언어로서 촛불과 태극기는 탄핵정국의 대통령선거운동을 위한 정치공학적 계산서를 꼬불치고 있다. 그것은 흔히 공작에 가까운 비열을 정의로 포장한다. 여기서 촛불과 태극기는 서로 이기려는 상충의 언어로 변질한다.
이념적 언어로서 촛불과 태극기는 좌파와 우파의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극단적 투쟁을 상징한다. 여기서 촛불과 태극기는 서로 없애려는 상극의 언어, 상멸(相滅)의 언어로 타락한다.
촛불과 태극기는 시적 언어로 들어서야 포근한 봄날의 햇볕같은 언어로 되살아난다. 희망의 메시지도 성립한다. 촛불은 태극기를 밝혀주고 태극기는 촛불을 지켜줘야지 않나? 여기서 `촛불`이란 민주시민사회를 밝혀주는 시민성이고 `태극기`란 헌법정신의 국가를 지켜내는 애국심이다.
촛불의 대선 후보가 여럿 나섰다. 태극기의 대선 후보도 여럿 나섰다. 반기문이 그 별명답게 뱀장어처럼 사라진 뒤에는 느닷없이 꼴뚜기들마저 그냥 튀어나오는 형국이다.
`좌 촛불, 우 태극기`의 무대는 탄핵심판의 대상으로 미끄러진 박근혜가 설치한 것이지만, 그 무대에서 주인공은 처음부터 계속 문재인이다. 두 인물은 올해 새봄의 가장 문제적 개인인 동시에, 가장 영향력 강한 지도자이다.
지도자는 통치의 언어로 말해야 한다. 통치의 언어는 물론 문학(시)의 언어가 그러하듯 일상의 언어이다. 그러나 일상의 언어가 시에서는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처럼, 통치의 언어도 리더십에서는 새로운 생명을 얻어야 한다. 그게 아니면 지도자로서 큰 결함이다. 이 결함은 국격(國格)마저 떨어뜨리곤 한다. 미국 대통령 트럼프와 오바마를 비교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문재인은 촛불이 태극기를 태우기 바라는가? 그 상충, 그 상극, 그 상멸의 승리라도 승리만 움켜쥐고 보자는 것인가? 아마도 아닐 것이며, 또 아니기를 나는 작가로서 희원한다. 그래서 내가 문재인이라면, 지금 그릇이 큰 리더십의 언어로 말하겠다. 시민들이 암송하고 싶은 시처럼, 이렇게.
“촛불은 태극기를 태우지 않습니다. 촛불은 어둠이 와도 태극기를 밝혀줍니다. 이제 우리는 헌재 심판을 차분히 기다립시다. 탄핵을 인용하면 촛불을 투표장 안내하는 꽃길처럼 다시 켭시다. 설령 탄핵을 기각해도 좀 늦춰지는 그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민주주의의 시민적 덕성이 우리 가슴마다 켜놓은 촛불은 결코 꺼지지 않을 것이라고, 우리 스스로 믿기 때문입니다.”
박근혜는 태극기가 촛불을 꺼버리기 바라는가? 그 상충, 그 상극, 그 상멸의 생존이라도 대통령의 잔임만 움켜쥐고 보자는 것인가? 아마도 아닐 것이며, 또 아니기를 나는 작가로서 희원한다. 그래서 내가 박근혜라면, 지금 진실한 통치의 언어로 말하겠다. 시민들이 기억하고 싶은 시처럼, 이렇게.
“태극기는 촛불을 끄지 않습니다. 태극기는 촛불을 지켜주는 바람막이입니다. 이제 헌재 심판을 차분히 기다려주십시오. 탄핵을 기각해도 저는 스스로 청와대를 떠나겠습니다. 대한민국은 태극기가 촛불을 지켜주고 촛불이 태극기를 빛내주는 그런 나라, 그런 사회로 성숙해야 하고, 저의 용퇴를 우리 국민은 통합의 힘으로 승화할 것이라고, 저는 믿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