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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집이 화근

서동훈(칼럼니스트)
등록일 2016-09-22 02:01 게재일 2016-09-22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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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기 중반, 신라의 문물과 경제가 최고조를 달리던 시절, 당시 신라왕경의 인구가 90만 명이었다 하니 지금의 경주시 인구의 3배.

779년 혜공왕 때의 대지진으로 1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는 기사가 삼국사기에 있고, 삼국유사에는 지진기사는 없고 “도적떼가 창궐해서 감당이 안 되었다”는 말과 “혜공왕은 선덕왕과 김경신에게 죽임을 당했다”란 기사만 있다. 당시 혜공왕은 8세에 등극해서 태후(太后)가 수렴청정을 했고 도적떼에 대지진까지 겹쳐 결국 왕은 측근 대신에 의해 제거됐다. 신라는 이때부터 `시해(弑害)` `찬탈`이 이어지고, 후백제 후고구려 같은 호족세력이 발호하는데 국망의 결정적 도화선이 된 것은 799년의 대지진이었다.

당시 신라 왕경에는 기와집이 빽빽히 들어섰고 숯으로 취사를 하고 음악이 그칠 새 없을 정도로 귀족들은 부와 사치를 누렸다. 그런데 지진이 왔을 때 흉기가 된 것이 바로 `기와집`이었다. 찰흙을 놓고 두꺼운 기와를 올려놓는 공법이니 `접착력`이 없고, 목조건물 또한 땅 위에 `얹혀 있는` 구조다. `엄청난 무게와 부실한 구조`의 기와집은 땅이 흔들릴 때 속수무책이다. `100명 이상 사망`이란 기사는 사실이다.

5.1, 5.8, 4.5, 세 번의 지진을 맞은 경주에서 피해를 본 곳은 주로 기와집이었다.

`고도보존법`에 의해 기와 올린 한옥을 권장·지원하는 바람에 기와집이 1만2천여 채를 넘게 됐다. 특히 황남동 한옥마을과 인왕동 정비구역은 이번에 큰 피해를 입었다.

기와지붕이 `전통미`는 있지만 지진에는 취약하니 대안(代案)을 내놔야 한다는 소리가 높다. “무게는 가볍고, 고정시킬 수 있는 동(銅)기와가 좋다” 한다.

`고도보존법`에는 맹점이 또 있다.“가옥의 경우, 전파 혹은 반파만 보상”이란 조항이 문제인데 이 조항대로 하면 보상받을 사람이 없다. 기와가 일부 무너져 내리고, 벽에 금이 간 것은 `반파`도 아니다. 법에는 아예 지진·태풍피해에 대한 언급조차 없다. 법과 시행령을 뜯어고쳐야 할 때가 왔다.

/서동훈(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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