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9년 혜공왕 때의 대지진으로 1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는 기사가 삼국사기에 있고, 삼국유사에는 지진기사는 없고 “도적떼가 창궐해서 감당이 안 되었다”는 말과 “혜공왕은 선덕왕과 김경신에게 죽임을 당했다”란 기사만 있다. 당시 혜공왕은 8세에 등극해서 태후(太后)가 수렴청정을 했고 도적떼에 대지진까지 겹쳐 결국 왕은 측근 대신에 의해 제거됐다. 신라는 이때부터 `시해(弑害)` `찬탈`이 이어지고, 후백제 후고구려 같은 호족세력이 발호하는데 국망의 결정적 도화선이 된 것은 799년의 대지진이었다.
당시 신라 왕경에는 기와집이 빽빽히 들어섰고 숯으로 취사를 하고 음악이 그칠 새 없을 정도로 귀족들은 부와 사치를 누렸다. 그런데 지진이 왔을 때 흉기가 된 것이 바로 `기와집`이었다. 찰흙을 놓고 두꺼운 기와를 올려놓는 공법이니 `접착력`이 없고, 목조건물 또한 땅 위에 `얹혀 있는` 구조다. `엄청난 무게와 부실한 구조`의 기와집은 땅이 흔들릴 때 속수무책이다. `100명 이상 사망`이란 기사는 사실이다.
5.1, 5.8, 4.5, 세 번의 지진을 맞은 경주에서 피해를 본 곳은 주로 기와집이었다.
`고도보존법`에 의해 기와 올린 한옥을 권장·지원하는 바람에 기와집이 1만2천여 채를 넘게 됐다. 특히 황남동 한옥마을과 인왕동 정비구역은 이번에 큰 피해를 입었다.
기와지붕이 `전통미`는 있지만 지진에는 취약하니 대안(代案)을 내놔야 한다는 소리가 높다. “무게는 가볍고, 고정시킬 수 있는 동(銅)기와가 좋다” 한다.
`고도보존법`에는 맹점이 또 있다.“가옥의 경우, 전파 혹은 반파만 보상”이란 조항이 문제인데 이 조항대로 하면 보상받을 사람이 없다. 기와가 일부 무너져 내리고, 벽에 금이 간 것은 `반파`도 아니다. 법에는 아예 지진·태풍피해에 대한 언급조차 없다. 법과 시행령을 뜯어고쳐야 할 때가 왔다.
/서동훈(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