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면 독일과 프랑스의 관계는 역사적으로 그리 친숙한 관계는 아니었다. 과거 카롤링거왕조의 칼대제 사후의 분열과 이후 오늘날의 프랑스는 1천년 가까이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었으며, 오늘날 독일이 포함된 중부 유럽의 경우 250여 개의 연방국가로 분열되어 있었다. 비록 문화적인 공감대를 가지고 있지만 근현대사에서 독일과 프랑스의 관계는 상당히 큰 원한관계를 가지고 있다. 최소한 1789년 프랑스대혁명 시기와 이어진 나폴레옹 시대에 프로이센과의 잦은 전쟁이 그 관계를 증명해 주고 있다. 독일은 1871년 프랑스와의 전쟁에 승리함으로써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루었고, 베르사이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패전국 프랑스의 항복서명을 받고 독일제국을 선포할 정도로 프랑스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주었다. 그뿐이 아니라 프랑스는 독일이 일으킨 양차대전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국가이다.
그러나 독일과 영국, 독일과 프랑스의 관계를 결정적으로 변화시킨 것은 후발 산업혁명 국가로 뒤늦게 제국주의 경쟁에 뛰어든 독일이 통일된 이후부터이다. 중부유럽의 새로운 강자 독일은 1890년부터 세계정책을 추진하면서 기존 제국주의 국가인 영국과 프랑스에 도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으로 나타났다.
유럽 근현대사를 통해 볼 때, 프랑스와 영국 두 나라 모두 독일에 대한 커다란 심리적 공포를 가지고 있지만 프랑스의 공포는 영국의 그것보다 훨씬 크다. 또한 동일한 공포에도 프랑스는 전쟁과 파괴에 대한 역사적 경험에서 평화를 추구했다. 반면 영국의 입장은 조금 다르다. 동일한 공포에서 영국에게 독일은 절대로 친구가 될 수 없는 소위 제재대상이다. 영국이 양차 세계대전 이후 지속적으로 대륙보다 대서양 너머 미국과의 전략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 또한 바로 이러한 심리적인 배경에서 기인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영국의 선택은 대륙에 대한 지나친 공포와 견제의 결과이자 소위 영국이 과거 `역사의 창을 통해 얻은 잘못된 교훈`이다.
영국독립당(UKIP)의 나이젤 패라지 대표가 `영국의 주권과 독립기념일`을 기치로 투표에서 승리한 것은 영국이 가진 대륙에 대한 역사적, 심리적 공포나 피해의식이 얼마나 큰 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신뢰와 평화를 뒤로 하고 자국의 이익을 앞세운 브렉시트로 인해 향후 영국의 국제적 지위는 현저히 약화되거나 리틀 잉글랜드(Little England)로 전락할 수 있을 것이다.
당초 브렉시트(Brexit)에 대한 국민투표 실시는 독일과 프랑스 주도의 유럽연합에 대한 견제를 의미하는 전략적 카드였다. 이제 영국이 꺼내 든 전략적 카드는 사라졌고, 영국은 오히려 더 큰 공포를 부메랑으로 받았다. 영국의 국론은 분열되었으며, 잔류지지의 젊은이들과 탈퇴지지의 노년층 사이에는 세대 간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 그러나 역사라는 시계는 거꾸로 돌지 않는다. 불행하게도 영국은 젊은이들에게 자유와 평화라는 원대한 미래의 길을 안내하는 존경받는 노년층을 갖지 못했다. 오히려 영국적 나르시즘인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과 같은 과거 식민제국주의의 불행했던 역사를 중심으로 민족주의를 부추기는 시대에 뒤떨어진 계층이 더욱 많았다. 때문에 유럽의 항구적 평화를 모토로 오늘날 유럽연합의 모태가 된 유럽기구 창설의 주창자이자, 영국 국민들의 영웅인 윈스턴 처칠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고 한 역설적 명언을 영국 국민들은 다시 소환해야 할 것이다.
한편 영국의 탈퇴는 유럽연합에 새로운 과제를 안겼다. 우선 기존 유럽연합의 정치경제적 헤게모니에 대한 변화가 필요하며, 보다 형평에 맞는 세력균형을 모색해야 한다. 영국정부의 브렉시트 발표 직후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오늘은 유럽 통합 절차의 전환점”으로, 프랑스의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전진하기 위해서는 유럽은 예전처럼 행동할 수 없다”라고 언급한 것은 바로 유럽연합의 향후 과제가 무엇인 지를 잘 알려주고 있다. 브렉시트는 유럽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보다 근본적으로 성찰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