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만치 고양이가 한 마리 지나갑니다. 한눈에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고양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군살이 없는 몸매와 경계심이 잔뜩 밴 행동이 그렇습니다. 요즘은 고양이를 집안에서는 잘 기르지 않아서인가 주위에 도둑고양이로 살거나 아니면 아예 산짐승으로 살기도 합니다. 호랑이나 늑대 같은 맹수들이 없는 숲에서 야생 고양이는 먹이사슬의 꼭대기를 차지하는 포식자(捕食者)인 셈입니다. 사뿐한 몸동작과는 달리 숲을 팽팽한 긴장감으로 몰아넣는 놈이지요. 아까 그 꺼병이들이 무사할지 걱정입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낙원입니다. 인간이 개입하지 않은 자연 상태, 즉 오염과 파괴가 안 된 생태계가 바로 정토낙원이지요. 땅 위에 그 이상의 파라다이스는 존재할 수가 없으니까요. 반세기 넘도록 사람의 발길이 통제된 휴전선 비무장지대가 동식물들에게는 낙원인 까닭이지요.
그것은 그러나 인간이 꿈꾸는 이상향과는 거리가 멉니다. 문명과 격리된 타잔이나 로빈슨 크루소를 꿈꾸는 게 아니니까요. 하지만 지구상에서 건강한 생태계 이상의 낙원을 꿈꾼다는 것은 결국 욕심과 어리석음이 지어낸 망집(妄執)일 뿐입니다. 문명이란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는 것이고 생태계를 파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니, 일시적인 성과는 몰라도 소위 `지속 가능한` 세상일 수는 없는 것이지요.
자유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종교적 구원이나 해탈이 아니라면 자유의 본질은 자연스러움 이상일 수가 없습니다. 사람 역시 생태계를 떠나 살 수 없는 자연의 일부이기에 그렇습니다. 자연스러움이란 인위적 간섭이 없는 자연생태계의 균형과 질서를 말하는 것이지요. 사자나 하이에나 같은 포식동물이 없는 초원이 얼룩말이나 가젤영양의 낙원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포식동물이 수시로 잡아먹어 개체수를 조절해 주지 않으면, 과잉번식으로 인한 먹이의 고갈되로 초식동물이 더이상 생존할 수 없게 되는 것이 자연의 이치니까요.
생태계의 먹고 먹히는 긴장관계를 벗어난 자유를 꿈꾼다는 것은 과욕이고 오만이고 오산입니다. 문명화된 인간사회라 할지라도 자유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나 아니면 남이라도 그 값을 치러야 하는 것이지요. 세상에 남을 억압하지 않는 자유란 환상일 뿐이니까요.
인류는 그동안 문명이라는 꾀를 동원하여 생태계의 균형과 질서를 파괴하면서 과잉번식을 해왔습니다. 칠십억이 넘는 개체수는 생태계는 물론 인류 자신에게도 재앙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는 다른 동물에 비해 수천 배나 많은 숫자니까요. 인류의 직접적인 훼손이나 배출하는 공해로 인해 멸종되는 동식물만도 해마다 100종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제 인류에게 남은 과제는 파괴하고 오염시킨 자연에 대해 참회하는 일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야말로 닥쳐올 종말을 멈추고 지속가능한 삶이 되게 하는 유일한 길일 것입니다.
꺼병이들을 걱정하는 나보다는 고양이가 훨씬 이 숲에 잘 어울릴지 모릅니다. 벌써 숲의 일원으로 먹이사슬의 한 축을 루고 사는 것 같으니까요. 고양이가 꺼병이들을 잡아먹어도 꿩의 개체수는 아마도 적당 선에서 유지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