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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을 타고 가 본 전통적 향사(享祀)

등록일 2016-04-25 02:01 게재일 2016-04-25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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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한동<br /><br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지난 일 년 동안 문중일로 동분서주한 적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영남 여러 문중의 원로들을 뵈올 기회가 있었다. 영남에 유림이 많고 양반이 많다는 소리는 익히 듣고 자랐지만 이 지역 골골에는 아직도 이름난 가문이 많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달포 전엔 인동 장(張)씨 여헌(旅軒)문중의 헌관(獻官)으로 초청되었다. 필자의 13대 조부 등암(藤庵) 배상룡(裵尙龍) 선생이 여헌 선생의 제자라는 인연 때문이다. 선조 등암은 여헌의 상사(喪事)시 장례위원장을 맡은 것으로 어릴 때 전해 들은 바 있다. 조선조 중엽 고향 성주 땅에서 이곳 구미의 서원까지 100리 길을 수학하러 온 선조의 모습이 갑자기 떠오른다. 여헌 장현광(張顯光) 선생은 조선 조 유학뿐 아니라 과학적 우주관을 설파한 영남의 대표적 유림 중 한 분이다.

사실 나는 이 향사에 참석하려고 했을 때 심적 갈등이 있었다. 집안의 몇 몇 어른들은 여헌 선생 향사에 헌관으로 참석하는 것은 영광이라고 권유해 주었다. 그러나 천주교 신자인 나로서는 약간의 심적인 부담이 상당하였다. 주변에서는 종교적으로 부활절을 며칠 앞둔 대림시기에 남의 집 향사에 참석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하는 교우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영남의 대학자인 여헌 선생 향사에 참석하고 예를 표하는 것은 종교적 교리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가톨릭 신자들이 항상 존경하는 고 김수환 추기경께서도 조상 묘소에 참배하셨다는 전언을 듣고는 상당한 위안이 되었다. 결국 나는 향사에 참석하여 여헌 선생의 얼을 되새기고, 인동 장씨 가문의 예절 법도를 체험하는 기회로 삼기로 하였다.

초청장에 명시된 입제 전날 오후 2시 행사장인 낙동강변 동락서원에 도착하였다. 이미 여헌 선생의 후손뿐 아니라 여러 문중에서 제관들이 많이 참석해 있었다. 양복이나 평복을 입은 사람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오랜만에 입어보는 두루마기 한복과 도포와 유건이 왠지 몸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러나 의관을 정제하여 먼저 온 참석자들에게 인사부터 정중히 올림으로써 일정은 시작되었다. 그래도 어릴 때 증조부 시하에서 사랑채에서 손님들에게 인사하는 범절만큼은 익혔음이 퍽 다행한 일이라 생각되었다. 당일 저녁 서원은 마루에서부터 안방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문의 제관들로 가득 메웠다. 서로 가문 어른들의 안부를 묻기도 하고 이 향사의 과거의 분장 표를 꺼내어 옛날을 회고하기도 하였다.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60여년 전의 옛날 여행을 하고 온 셈이다.

입제 전날 오후부터 이튿날 향사까지 배우는 자세로 향사 절차에 흐트러짐이 없이 참가하였다. 형식이 내용을 규정한다더니 도포를 입고 유건까지 쓴 나는 과거 유림사회의 일원이 된 듯 하였다. 조선조 어느 서원이나 제실에서도 이러한 회합이 빈번하게 개최되었을 것이다. 저녁 식사뿐 아니라 주안상도 헌관에게는 독상이 제공되었다. 저녁식사 후 향사의 업무를 나누는 분정(分定) 예식이 있었다. 넓은 대청에 도열한 제관들은 정중하게 상호 예의를 갖추고 분정 표를 작성하는 분을 지켜보았다. 향사 당일 새벽 일찍 세수하고 제관들은 60여 명이 사당 앞뜰에 도열하여 참례하였다. 홀기(笏記)에 따라 분향하고 잔 올리는 절차는 약 1시간 이상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물론 이러한 향사는 낭비라고 오늘날 반대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이 형식주의에 치우치고 허례허식으로 나아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주한 현대에도 향사의 긍정적인 측면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조상을 숭배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동방예의지국의 법도를 지키는 것도 이러한 행사와 무관치 않다. 이러한 유림 행사를 통해 인적 교류뿐 아니라 학문의 교류가 활발히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여하튼 일박 이일의 타임머신을 타고 본 향사참석은 나에게 영남 유림의 법도와 학맥을 되새기는 귀중한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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