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밀사를 헤이그에 밀파한 일이 발각나 고종이 강제퇴위된 후 즉위한 순종은 매일 덕률풍으로 부왕에게 문안인사를 올렸다. 1919년 고종이 독살되자 순종은 덕수궁 빈소와 홍릉 사이에 전화선을 가설, 상식(上食)때 마다 덕률풍에 대고 “애고 애고”곡(哭)을 했고, 능참봉은 수화기를 들고 서 있었다.
1960년대에는 `백색전화`와 `청색전화`가 있었는데, 백색전화 5대면 30평짜리 강남 아파트를 살 수 있었고, 복덕방들은 `백색전화 취급`이라 써붙였다. 당시 공중전화가 유행이었는데, 100원 동전을 넣고 통화하다가 몇십원 남기고 끊으면 그 남은 돈을 전화통이 먹어버렸다. 이것을 낙전(錢)이라 했는데, 우리나라 통신산업발전의 밑천이 된 것이 바로 이 `낙전`이었다. 오늘날 스마트폰 시대에 생각하면 실로 금석지감(今昔之感)이 든다.
사진기술을 처음 도입해서 첫 어진(御眞)사진을 찍은 이도 고종이었다. 1884년 미국 사진사 노엘이 찍은 것으로 그 원본은 지금 보스턴미술관에 보관돼 있다. 한국인 사진사가 찍은 최초의 고종 사진은 1905년 `왕실 사진사 김규진이 덕수궁에서 찍은 고종황제 어진`이다. 본래는 흑백사진이지만 황제 곤룡포의 색깔 황색을 옷에 입히고 익선관을 보라색으로 칠했다. 이 `천연색 사진`을 고종은 미국 사절단에 선물로 주었고, 사절단은 이를 박물관에 기증했는데, 최근 `국외소재문화재단`이 뉴어크박물관 소장품을 조사하다가 발견했다.
선진문물을 열심히 받아들이고 힘을 길러 망국의 한을 씻겠다는 의지를 가진고종의 모습은 `어리석은 왕`이란 평가 뒤에 가려져 있었다. 친일파와 국론분열과 일본의 교활한 침략근성을 고종 혼자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었을 뿐이다.
/서동훈(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