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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사건, 세 가지 시선

등록일 2015-09-25 02:01 게재일 2015-09-25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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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에게 1951년 베네치아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안겨준 `라쇼몽`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소설에 의지한다. 1915년 작 `라쇼몽`과 1922년 작품`덤불 속`이 그것이다. 영화의 공간적 배경과 제목을 헤이안 시대 경도(京都)의 `라쇼몽`으로 설정하고, 사건과 등장인물은 `덤불 속`에서 끌어온다. 영화는 `라쇼몽`에서 비를 피하고 있던 세 사람의 인물이 주고받는 대화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원작에 없던 설정이다.

이 글의 목적은 영화와 원작의 세밀(細密)한 분석이 아니다. 백주대낮에 일어난 사무라이 살인사건을 바라보는 세 가지 시선이 핵심이다. 아내를 말에 태우고 길을 가던 사무라이가 다조마루라는 산적에게 살해당한다. 그런데 살인사건과 직접 연루(連累)된 세 사람 이야기가 모두 다르다. 사무라이는 죽은 무당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설명한다. 여기서 우리는 동일한 사건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각을 명징하게 확인한다.

다조마루는 말한다. “사무라이를 죽이지 않고 그의 아내를 겁탈하고자 했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쓰러져 우는 여자를 남겨두고 덤불 밖으로 도망치려하자 사무라이의 아내가 `당신이든 남편이든 어느 한쪽은 죽어야 한다. 두 남자에게 치욕(恥辱)을 당하느니 죽는 게 낫다`고 말했다. 그래서 남편의 밧줄을 풀어주고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겨뤄서 그자를 죽였다. 결투(決鬪)가 끝나고 보니 여자가 사라져버렸다.”

사무라이의 아내는 말한다. “산적에게 강간당하고 난 다음 남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나를 경멸하는 차가운 눈빛이었다. 그 눈빛에 정신을 잃어버렸다가 깨어보니 나무에 묶인 남편만 있고 산적은 사라졌다. 남편의 싸늘한 경멸과 증오의 눈빛은 여전했다. 나는 치욕과 분노, 노여움 때문에 남편 가슴에 단도를 꽂아 넣었다. 나 역시 죽으려고 여러 번 시도(試圖)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청수사`에 몸을 의탁(依託)하고 있었다.”

사무라이의 죽음을 둘러싼 세 사람의 증언은 확연히 갈린다. 다조마루는 결투를 해서 사무라이를 죽였다고 한다. 아내는 사무라이 남편을 죽인 장본인(張本人)이 자신임을 확인한다. 사무라이 자신은 자결로 목숨을 버렸다고 증언한다. 대체 누구의 말이 진실인가?! 영화도 소설도 누가 사무라이를 죽였는지, 명확하게 확인해주지 않는다. 그저 우리에게 문제를 제기할 따름이다. 왜 이토록 현격한 차이가 발생하는가?!

우리는 단순하지만 중요한 결론에 도달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보고 듣는다는 교훈이다. 그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속성 (屬性) 가운데 하나다. 중요한 어떤 사안(事案)에 대해 누군가에게 조언을 구할 경우에도 우리는 어느 정도 심중(心中)에 결정을 내린 연후에 문제를 제기한다. 우리가 원하는 대답이나 그것에 가까운 조언이 나올 때까지 끈질기게 기다리고 때로는 결론을 유도(誘導)하기도 한다.

내가 원하는 답변이나 조언을 해주는 사람을 우리는 동지나 친구 내지 멘토라고 생각한다. 원하는 것과 반대되는 결론을 제시하는 사람을 우리는 어리석은 자 혹은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결론 내린다. 여기에 사태의 핵심과 맹점(盲點)이 자리한다. 동일한 눈길로 동일한 곳을 동일한 목적으로 바라볼 때 붕당(朋黨)과 파벌(派閥)과 만장일치가 생겨난다.`우리가 남이가` 하는 의식은 그런 분위기와 조건 속에서 스멀스멀 형성된다.

왜 다른가, 어디가 어떻게 다른가, 나와 다른 결론은 어떤 결과를 잉태(孕胎)하는가, 그런 것을 살피는 작업이야말로 21세기를 현명하게 살아가는 방법이다. 무지개에 담겨 있는 일곱 가지 색깔은 모두 다르지만 지극한 조화로움으로 아름다움의 극치를 선물한다. 일컬어 `화이부동`이라 한다. `동이불화`를 넘어서는 `화이부동`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그런데 독자 여러분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을 보셨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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