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0월 3일은 독일이 통일 된지 25주년이 된다. 통일에 관한 열망은 아직도 남북 주민들의 가슴속에 남아 있다. 남북의 대화가 재개될 때마다 우리의 통일의 꿈도 함께 깨어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도 독일식 평화통일 방식을 선호하고 있다. 베트남이나 예멘 식의 통일 방식은 남북 어디에서도 환영 받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통일 정책을 논의하고 통일의 준비 과제를 제시할 때도 독일의 통일 모델은 우리의 선망의 모델이 되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의 상황과 통일 환경은 통일 전의 독일과는 너무 다른 데 문제가 있다.
먼저 서독 정부는 정당간의 정권 교체와 관계없이 지속적인 대 동독 통일 정책을 추진하였다.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기민당에로의 정권 교체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유지 보완되었다. 독일 기민당의 총리 헬무트 콜은 1990년 10월 3일 독일 통일의 열매를 수확하였다. 유럽 통합을 전제한 독일 통일 정책은 인접 프랑스 뿐 아니라 소련과 미국을 안심시켰다. 우리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을 `잃어버린 10년`으로 간주하고 완전히 폐기하고 말았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 강경정책은 남북관계를 다시 냉전 시대로 돌려놓았다. 이러한 통일 정책의 혼선과 일관성 상실은 통일의 이정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결국 박근혜 정부의 신뢰프로세스나 통일 대박론도 다시 `잃어버린 5년`을 복원하는 데서 출발하는 수밖에 없다.
양독 간의 활발한 교류 협력이 독일 통일의 초석이 되었다. 그 결과 동독인들은 서독을 너무나 잘 알 수 있었다. 동서독 분단 후 동독 주민 480만명이 합법적, 비합법적 수단을 동원하여 서독으로 탈출하였다. 통일 당시 동독인구 1천600만명의 약 25%가 이주한 셈이다. 우리는 분단이후 약 2만7천명이 목숨을 걸고 국경을 탈출하여 남한에 정착하였다. 통일 전 독일과는 숫적으로 비교도 안 된다. 이미 1950~60년대에 매년 동독 주민 100만 명이 서독을 방문하고, 통일 전야 1988년에는 서독인 675만명이 동독의 가족과 친지를 방문하였다. 우리는 지난 35년 동안 적십자의 주선으로 겨우 4천991가족이 상봉하였고, 중단되었던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오는 10월 초순 재개된다. 너무나 대조적인 분단과 이산의 아픔이다.
동서독은 1970년대 2억통의 편지가 교환되고, 소포 3천600만건이 교환되었다. 양독은 통일 전 서독 기자 19명, 동독 기자 6명이 상대지역에 상주하면서 기사를 보냈다. 양독은 통일전부터 텔레비전을 동시에 시청하였다. 통일 전 동독인들 약 90%가 서독 텔레비전을 보고, 주말에는 분데스리가 축구 경기를 동시에 시청하고, 서독의 포르노 영화까지 함께 감상하였다. 언론의 통합이 독일 통일을 선도한 셈이다. 휴전선 일대에서 아직도 대북 선전 삐라를 날려 보내고, 북한 주민들이 아직도 북한이 `지상 낙원`으로 선전하는 언론매체에 익숙한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서독은 분단 시 엄청난 규모의 대동독 경제 원조를 추진하였다. 어느 통계에 의하면 서독은 1년에 평균 약 26억불의 물자와 경제 협력 자금을 동독에 보냈다. 이 금액은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기 10여년 간 우리가 지원한 대북 지원 액수보다 많은 금액이다. 그러나 우리는 `퍼주기 논쟁` 끝에 그것마저 중단하였다. 한편 서독 교회는 동독 교회에 30여년 동안 53억 마르크(약 33조원)를 지원하였다. 그 중 반이 서독 정부의 돈이 포함되어 있다. 당시 동독에는 개신교와 가톨릭 신자가 500만명이 건재하여 예배와 미사를 올린 결과이다. 동독이 종교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허용한 점이 지금의 북한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다. 북한은 헌법상 종교의 자유를 허용한다고 선전하지만 봉수 교회와 장충 성당의 사이비 교인 외에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도 이런 저런 독일식 통일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그러나 그 길은 멀고 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