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 침엽 끝에 매달린 물방울이 진주처럼 반짝인다. 도심의 포도 위에 콩 튀듯 쏟아지는 소란스런 빗소리가 젊은이들이 즐기는 테크노음악이라면, 잘 썩은 부엽토 위에 사뿐사뿐 내리는 비는 차분한 클래식이다.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비는 시든 나뭇잎을 위한 탱탱한 수유의 시간이다. 청진기를 갖다 대면 가지마다 쪼르륵 쪼르륵 제 몸속으로 물 길어 올리는 소리 들리겠다.
그해, 망종도 되기 전에 시작된 장마는 논바닥에 베어 눕힌 보리를 갈무리할 새도 없이 붉덩물에 잠겨버렸다. 고슬고슬 마르지 않으면 도리깨타작은 불가능하다. 여우볕에 말려보려고 물에서 건져낸 보릿단을 안고 밭두렁으로 산비탈로 옮겨 다녔다. 오랜 투병환자의 욕창을 막기 위해 수시로 닦고 돌려 눕히는 병수발이었다. 거두어 쌓아둔 보리 더미에서도 두엄냄새가 피어올랐다. 한 알의 이삭이라도 건져보려고 뒤집고 헤집기를 계속했지만 거둘만하면 다시 젖기를 반복했다. 한 달여 계속된 장마에 보리는 결국 아래로는 뿌리를 내리고, 위로는 잎을 키웠다. 힘 좋은 머슴들도 어찌해볼 수 없는 애간장 타는 일이었다.
보리는 가난과 배고픔의 상징이다. 전해에 수확한 양식은 바닥나고, 보릿고개를 참지 못해 영글지도 않은 풋보리를 삶아서 죽을 쑤어 먹던 집들이 있었다. 가난한 농가에 보리양식은 곧 생명줄이었다. 한 톨의 밥알도 먹을거리에 대한 훼손은 금기였으니 배고프지 않아도 되는 집이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었다.
어머니의 한숨이 밤마다 한 음씩 높아가더니 종내는 끙끙 앓는 신음소리로 변해갔다. 농사일을 두량 하며 몸을 혹사해온 어머니에게 곡식은 자식이나 진배없었다. 가축이 텃밭의 남새 한이랑 짓이겨도 탈기를 하는 것이 농부의 심정인데 수확을 앞둔 곡식을 곱다시 썩히는 일임에랴. 잠자리에 누워 듣는 빗소리는 가슴이 졸아드는 고문이었으리라.
“제발, 다 떠내려가도 내버려둬라. 끙끙 앓는다고 건질 방도가 있나. 한 해 보리농사 실패한다고 굶어 죽는 것도 아니고.”
벽을 타고 건너오는 아버지의 위로는 어머니의 신음보다 더 가슴이 저려왔다. 아버지는 와병으로 공직에서 물러나 휴양 중일 때였다. 세상사엔 어린아이 같아서 부처님 가운데 부분 같다는 남들의 평가였지만, 일가를 책임져야하는 가장의 입장에선 덕담으로 받아들일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곁자리에 누워 밤마다 어머니의 한숨을 들어야 했을 아버지. 나처럼, 보리가 썩는 걱정보다 어머니의 한숨에서 달아나고 싶지는 않았을까.
어머니가 잠든 새벽녘이면 내방 봉창 너머로 아버지의 숨죽인 발자국소리가 지나갔다. 조심조심 뒤란으로 돌아가 짚 동 사이에서 소주병을 꺼내 홀짝이셨다. 아버지께 술은 금물이었고 가슴이 철렁했지만 나는 아는 체 하지 못했다. 몇 모금의 술이 위안이 될 것이라 여겼다. 아버지의 심중을 헤아린답시고 눈감은 것이지만, 나 또한 고통스런 신경 줄 하나를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자는 척 엎드려 있었지만, 온몸의 신경 다발이 그리로 향한 체 오그라들곤 하였다. 비만 그쳐준다면, 그러면 모든 걱정이 일시에 해결될 것 같은 간절한 소망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머니의 한숨과 아버지 음주의 비밀과 코스모스씨앗처럼 홀쭉해진 쓰디쓴 보리밥을 먹던 기억이 비에 섞여 내린다. 내 성장의 언저리에 옹이를 박고 관통해간 그해 여름의 오란비처럼. 아버지가 드신 술이 그것만은 아니지만, 술이 아버지의 명을 단축시켰음을 부인할 수 없는 까닭이다.
비는 좀처럼 그치지 않는다. 점점이 떨어지는 빗방울이 아버지의 기나긴 말줄임표 같아 서럽다. 오란비 계절이면 나는 아버지가 못다 하신 이야기 몇 문장 풀어 읽으려고 물음표로 서 있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