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아니 에르노는 `남자의 자리`에서 가난하고 초라한 아버지를 중세의 환경이라고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알려졌다시피 아니 에르노의 작가적 고집은 겪은 것만 쓴다는 데 있다. 그녀의 적나라한 화법은 제 아버지에 대해서 말할 때에도 예외가 없었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마들렌느 과자를 적신 홍차 향에 취해 부르주아 창가를 서성일 때, 동시대를 살았던 아니 에르노의 아버지는 자식들 몸에서 빈대나 이를 퇴치하기 위해 마늘향 주머니를 꿰매 달아야 했다. 핍진(乏盡)한 가계사마저 핍진성(逼眞性)을 획득하는 건 에르노식 화법이 주는 아픈 감동이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친구가 생일 선물로 소포를 보냈는데 꽃이 담겨 있다. 사각 유리꽃병과 함께 전지가위도 들어있다. 기대하지 않은 상태의 황홀감인지라 잠시 암전 상태가 된다. 사실 책을 읽는 동안 기분 전환이 필요했었다. 아버지의 중세를 이야기하는 아르노의 고백이 너무 담담하고 현실적이라 따끔거리고 쓰렸다. 이런 침체된 마음에서 벗어나고 싶었는데 비현실적이리만큼 낭만적인 정서가 펼쳐지다니. 다발을 이룬 꽃 이름도 핑크 라넌큘러스, 호와니, 핑크 튤립, 홍버들 등으로 이국적 위안을 부추겨 주었다.
꽃은 그 뒤로도 시리즈로 배달되었다. 한 달에 걸쳐 생일을 축하 받은 셈이었다. 두 번 세 번 꽃이 이어질 때마다 내 중세적 염세가 낭만적 환상으로 치유되는 느낌을 받았다. 구차와 굴욕의 인생 트라우마에 가장 좋은 치료법은 꽃이라 했다. 친구도 그것을 알고 있었을까. 그러니까 오늘의 말씀, 마음이 중세인 사람이 미래로 건너가게 하는 가장 큰 명약은 꽃이다. 그 꽃을 전하는 이야말로 진짜 꽃이다.
/김살로메(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