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반 북한의 김정일이 기차로 중국 상해를 방문하였다. 포동지구와 황포강 하구의 빌딩 숲을 보면서 그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조국 북한의 초라한 모습을 떠 올리며 `아버지가 그 동안 무엇을 했는가`하면서 김일성을 원망했다는 설이 있다. 그가 등소평의 흑묘백묘(黑猫白猫)론에 따른 중국식 개혁·개방의 필요성을 절실히 인식한 순간이었다. 귀국 후 김정일은 북한 전역에 `신사고`를 강조하면서, 2002년 북한식 `7.1 경제 개선 조치`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그는 2011년 12월 17일 70세로 재위 14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29세의 김정은은 어느 날 갑자기 북한의 최고 통치권자가 되었다. 김정일에 비해 최고 지도자 수업이 턱없이 부족한 그였다. 스위스 베른의 2년간 유학 생활이 짧지만 발전된 서구사회를 체험하는 기회였다. 그가 선군 정치를 강조하면서도 주민들의 소비 생활향상을 다그치고, 능라도의 놀이 공원, 평양의 수영장, 마식령 스키장도 서둘러 개장한 것도 서구식 경험의 소산이다. 김정은은 북한의 합영법에 따라 외자 도입에도 관심을 보이고 경제 개발을 위한 소위 5대 경제 특구를 발표하였다. 북한 당국은 지난해 나선 경제무역지대와 황금평·위화도경제지대, 신의주 국제경제지대, 개성공업지구, 금강산국제관광특구 등 5개 경제특구와 19개 경제개발구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중국과 달리 어느 특구 하나 외국 투자가 없어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남한 자본과 기술이 투입된 개성 공단만이 그대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북한의 이러한 경제 개방 특구는 한마디로 성공을 거두기 어렵다.
그것은 첫째, 북한은 중국식 실용주의적 개혁 개방의 기회를 놓쳤기 때문이다. 중국은 공산당 일당제이지만 최고 권력 창출의 메카니즘을 마련하고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를 정착시켰다. 중국의 등소평, 조자양, 강택민, 호금도에 이은 오늘의 시진핑(習近平)은 중국식 사회주의적 시장 경제(socialist marketing)를 정착시켰다. 그러나 북한은 `주체와 자주`라는 명분으로 수령 독재를 강화하면서 제국주의 타도라는 명분으로 자본주의적 실험인 개방을 거부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의 경제 특구는 외자의 유치뿐 아니라 경제의 소생도 성공할 수 없는 것이다.
둘째, 북한에서도 내부적으로 경제 발전을 위해 대내외 개방을 서둘러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지만 모두 묵살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경제의 개혁·개방 관련 주장은 수령에 대한 불충으로 오인되어 결국 처벌되고 말았다. 과거 김일성 시대의 박금철·이 효순의 사건도 `남조선 경제보다 뒤진 북한 경제를 회생하기 위한` 일종의 충언인데 종파분자로 몰아 숙청하고 말았다. 북한 김정은의 측근핵심 중에는 아직도 사상과 이념을 앞세운 소위 군부 충성분자들인 이데올로그(ideolue)들이 실용성을 앞세운 테크노크라트(technocat)를 밀어내고 있는 것이다. 중국을 잘 알고 남한을 몇 차례 다녀간 관료 장 성택이 처형된 배경도 이와 무관치 않다.
셋째, 북한 김정은이 강조하는 핵·경제 병진 노선은 개혁 개방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북한의 `사회주의 강성 대국 건설`의 우선순위가 군사강국, 사상 강국, 경제 강국이라는 순위로 되어 있다.`자위`를 앞세운 핵실험과 핵무기가 북한 경제의 개방과 개혁을 옥죄고 있는 형국이다. 미국뿐 아니라 중국까지 북한의 핵무장을 비판하는데 북한은 아직도 미국을 향한 `제국주의 타도`를 외치면서 핵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쿠바까지 미국과 수교 하고 경제 개방과 발전의 토대를 잡아가는데 북한이 시대에 뒤진 발상을 버리지 못한 결과이다. 북한 김정은 정권은 체제 유지와 개혁·개방이라는 딜레마 앞에서 선택의 기로에 서있는 것은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