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설하고 고영민 시인의 `입춘`을 묵독한다. “봄은 오네 / 강가에는 한 무리의 철새가 모여 있네 / 모여 있는 곳으로 봄은 오네 / 강물은 반짝이고 / 흐름은 졸리네 / 한 구의 시신을 끌고 오네 / 나는 열두 살 / 오후 세 시” 시적 상황 속으로 감정이입을 한다. 바로 어제도 달려갔던, 지금은 달라져버린 고향의 풍광 속으로 스며든다. 여과지를 넘는 물처럼 내 심상은 열두 살 오후 세 시 무렵의 입춘을 투과하고 있었다. 시에서처럼 강물은 반짝였고 그 흐름은 졸렸다. 달라진 게 있다면 한 무리의 철새 대신 한 쌍의 산노루가 마른 풀 섶으로 후다닥 사라진 정도랄까.
한 구의 시신을 끌고 오네, 라는 시구에서 잠시 멈췄다. 처음에는 스러지는 겨울을 상징하는 동네 어르신의 장례행렬 이미지가 떠오르다가, 봄을 맞기도 전인 어린 동무의 멍석말이 주검도 그려졌다. 하지만 오랜만에 바라본 고향의 언 강에서 쪼개진 얼음덩이를 본 순간이 떠오르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날 풀려 떼밀려오는 얼음조각을 본능적 시적 감성으로 낚았겠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여기까지 닿자 시인의 뜻을 알고 싶은 호기심이 일었다. 시인에게 새해 인사를 가장한 문자를 보냈다. 시체의 의미를 묻는 내 같잖은 질문에 즉각적인 답문이 왔다. 역시 시인다운 답변이었다. 시인답다고 말하는 건, 답을 듣고도 시인이 말하는 시체의 의미를 결코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명쾌한 답을 내는 건 산문가의 일이고, 시인은 역시 에두를 때 시인의 품격을 지닌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이 어떤 답을 했는지는 수수께끼로 남기련다. 그렇다, 그렇게라도 시인 흉내를 내보는 거다!
/김살로메(소설가)